[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7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72)
  • 경남일보
  • 승인 2017.03.2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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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72)

아버지도 다녀갔다. 올 사람은 호남이 뿐인데 일부러 노크까지 하는 것을 보니 누군가 궁금해졌다. 양지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예, 하고 들어와도 좋다는 응답을 보냈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으나 방문객의 얼굴은 얼른 나타나지 않았다. 약간의 긴장을 띈 시선 속으로 애플주스 박스의 모서리가 먼저 보였다. 그리고 삼십대 중반쯤의 여자가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양지를 마주보며 다가왔다.

계절로 보아 아직은 이르다 싶은 백색 면바지에 녹색 상의를 입은 날씬한 몸매의 여자. 짧은 커트 머리를 무스로 쭈뼛쭈뼛 세운 선머슴아 같은 헤어스타일이 파격적으로 어울리는, 쌈박해 보이는 인상이다. 가지고 온 정보와 부합되는 부분을 찾지 못한 듯 애매한 표정을 풀지 않고 있는 여자를 마주보며 양지는 침상에서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 이인용 병실인데 다른 자리는 내내 비어있었던 터라 호실을 잘못 든 모양인데 여자는 다른 병상을 살펴보는 등의 서슴도 없이 내처 양지 가까이로 다가오면서 긴가민가하는 탐색의 눈길을 양지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양지는 상대방의 지나치게 엉뚱한 관심이 쑥스러워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했다.

여자가 먼저 입을 열며 침상에 붙어있는 명찰을 동시에 읽는다.

“혹시 최 쾌남씨이? 맞네, 그래 쾌남이 맞지?”

누군가 만만하게 이름을 부르며 찾아올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였다. 당황한 양지를 무시한 채 여자는 세월의 두터운 휘장을 걷으며 목청을 높였다.

“정자다, 정자. 알것나? 면서기집 딸.”

아, 그렇다. 대문 앞에 커다란 대추나무가 서있던 면서기 집 공주병 말기쯤의 가시나. 양지는 당황한 가운데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경계심을 풀었다.

“어머나, 정자야.”

“나는 쪼끔 니 얼굴 알겠는데, 그래, 금방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벌써 이 십 년이 다 됐는데. 너 초등학교 졸업하고 반년 있다 읍내로 중학교 보내준다는 집에 애 봐주기로 나간 뒤 그만이었잖아.”

과거란 때로 참 비열하고 잔인한 정체를 드러낸다. 새삼스레 ‘아이보기’였던 옛날이라니. 양지는 이래서 고향을 멀리했고 고향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고향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곤 상처뿐인 생장과정이 전부다.

양지의 기분이 어떨 것은 상관도 없이 정자는 들고 온 주스를 머리맡의 사물함 위에다 얹어놓고 보호자용 의자를 끌어다 앉으란 소리도 하기 전에 앉는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던 옛말이 상기되는 순간이었다. 안하무인적인 저 행동. 대개가 농부의 자식들인 반 친구들의 가난한 차림과 볼품없는 도시락을 흉보며 찌푸리던 되알머리 없던 성품이었지만 그녀가 선심 쓰는 단물 빠진 껌을 얻어 씹기 위해 하루살이들처럼 따라붙었던 시절. 굳이 꺼낼 필요 없는 남의 상처를 회상의 지름길이랍시고 들추어내는 그녀의 얄팍한 소갈머리가 예전과 별로 다르게 성장한 바 없음을 한 눈으로 읽어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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