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장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개최국의 역할을 수행해준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누구 없나요?” 오바마는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운 한국 기자 중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 결국 질문 기회는 중국 기자에게 돌아갔다.
질문이 사라지고 있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자기 주도적 학습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부끄럽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처럼 수동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주변에서 ‘왜’라는 질문을 하는 학생들은 거의 볼 수 없다. 궁금해도 묻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질문하기를 꺼린다는 점이다.
질문을 꺼리는 모습은 대학에서도 자주 보인다. 강의를 마칠 때 쯤, 교수님은 질문 있는 사람을 찾는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들은 가방에 책을 넣고 나갈 채비를 한다. 학생들은 ‘질문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 이제 강의 끝이다’라고 받아들인다. 혹여 누군가 수업에 궁금한 점이 있어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한다면 그 학생은 모두의 ‘눈엣가시’가 되기 쉽다.
주변 사람 중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안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내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흔히 ‘프로 불편러’라고 한다. 전문가를 의미하는 접두사 ‘pro’와 ‘불편’, 그리고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를 합한 이 말은 ‘불편함을 느끼는 데 프로인 사람’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다. 때로는 이들을 향해 ‘모든 일에 너무 과하게 반응해 불필요한 갈등만 조장한다’고 ‘왜 저래’하며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프로 불편러’를 자처하는 이들이 “이거 나만 불편하냐”라고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묻혀 있던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권력이다. ‘왜’라는 질문은 답변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것이 두렵지만 용기를 내 ‘프로 불편러’를 자처해보자. 우리가 던진 작은 질문이 큰 변화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질문이 사라지고 있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자기 주도적 학습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부끄럽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처럼 수동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주변에서 ‘왜’라는 질문을 하는 학생들은 거의 볼 수 없다. 궁금해도 묻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질문하기를 꺼린다는 점이다.
질문을 꺼리는 모습은 대학에서도 자주 보인다. 강의를 마칠 때 쯤, 교수님은 질문 있는 사람을 찾는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들은 가방에 책을 넣고 나갈 채비를 한다. 학생들은 ‘질문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 이제 강의 끝이다’라고 받아들인다. 혹여 누군가 수업에 궁금한 점이 있어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한다면 그 학생은 모두의 ‘눈엣가시’가 되기 쉽다.
주변 사람 중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안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내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흔히 ‘프로 불편러’라고 한다. 전문가를 의미하는 접두사 ‘pro’와 ‘불편’, 그리고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를 합한 이 말은 ‘불편함을 느끼는 데 프로인 사람’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다. 때로는 이들을 향해 ‘모든 일에 너무 과하게 반응해 불필요한 갈등만 조장한다’고 ‘왜 저래’하며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프로 불편러’를 자처하는 이들이 “이거 나만 불편하냐”라고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묻혀 있던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권력이다. ‘왜’라는 질문은 답변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것이 두렵지만 용기를 내 ‘프로 불편러’를 자처해보자. 우리가 던진 작은 질문이 큰 변화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안지산(경상대학교 신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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