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 (94) 불일폭포
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 (94) 불일폭포
  • 경남일보
  • 승인 2017.06.1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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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산은 초록빛깔이 짙어지면서 풋풋한 산의 내음도 풋내를 품어내는 싱그러움의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일까, 청학도 이맘때가 좋아서 불일폭포를 찾았을까. “암자의 중이 말하기를 ‘매년 여름 몸뚱이는 파랗고 이마는 붉고 다리가 긴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였다가 날아 내려와 못물을 마시고 바로 간다’고 하더라.”는 탁영 김일손 선생의 ‘두류록’에 나오는 내용으로, 암자는 불일암이고 못은 불일폭포 아래의 소를 말하는 ‘학연(鶴淵)인데, 탁영 김일손 선생이 일두 정여창 선생과 함께 1489년 성종 20년 4월 14일 천령(함양)에서 출발하여 16일째 되는 날 지리산 등정의 하산 끝 날인 쌍계사에서 불일폭포까지의 발자취를 따라 500여년의 역사를 거슬러 오를까하고 길을 나섰다.

화개장터에서부터 시작되는 십리 벚꽃 길은 녹음 짙은 신록의 십리길이 되어 쌍계사 들머리까지 이어진다. 쌍계교를 건너서 탁영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새로 난 찻길을 두고 아래쪽의 옛길인 쌍계석문을 찾았다. 즐비한 식당가와 토속먹거리를 파는 간이매장들이 세월을 건너뛰어 수학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내는데 길 양편으로 우람한 바위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섰다. 바른쪽 바윗돌 벽면에는 ‘석문’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고 맞은편에는 바닥에 묻힌 커다란 바위 위에 흔들바위처럼 우뚝하게 올라앉은 웅장한 바위에는 ‘쌍계’라는 두 글자가 음각돼 있다. 쌍계대가람의 창건을 예비하고 대자연이 마련한 태초의 석문일까, 고운 최치원 선생이 쓰셨다는 ‘쌍계석문’을 두고 탁영은 글자 크기는 말(斗)만한데 여아동습자지위(如兒童習字者之爲)라 하여 아이들의 붓글공부 정도라고 하셨는데 속객에게는 판단조차 버겁기만 한 글씨이다. 법계와 속계의 경계이니 속계의 삿된 마음은 말끔히 버리라며 번득이는 칼날이 맞부딪쳐 번개 같은 불꽃을 튕기며 쇳소리가 날 것같이 날카롭기만 한 필체이다.

 
 


쌍계석문을 지나 매표를 거치면 울창한 활엽수들의 짙은 그늘이 카랑카랑한 계곡물소리에 사방으로 흩어지며 청량감을 더하는데 ‘삼신산 쌍계사’라는 편액을 단 우뚝한 일주문이 속객을 반긴다.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고 금강문을 지면 천왕문이다. 금강역사의 검문을 받았건만 창검을 든 사대천왕이 검문을 또 받으란다. 족히 네댓 길을 넘는 웅장한 거구의 위압에 꽥 소리도 못하고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불벼락이 떨어질 것 같아 목덜미기 쩌릿쩌릿한데 숨을 죽이고 기다려도 기척이 없으니 모르고 지은 죄도 더러 있을 텐데 눈감아 주나보다 하고 꾸벅꾸벅 절을 하고 통과를 하니 마당 가운데에 아기자기한 팔각의 9층 석탑이 우뚝하게 높이 섰다. 산뜻한 근작이다. 9층 탑 뒤에는 정면 일곱 칸의 맞배지붕인 2층 누각이 범종각을 옆에 두고 높이섰다. ‘팔영루’라는 편액이 붙었다. 탁영은 두류록에서 ‘절의 북쪽에 고운이 자주 올랐던 팔영루의 옛터가 있다’고 하며 ‘승려 의공이 다시 세우려 한다.’ 고 했는데 대웅전 앞마당의 정면에 웅장하게 서서 ‘금강계단’이라는 또 다른 편액까지 달았으니 이건한 것일까. 본래의 자리는 아닌 것 같다.

탁영은 석문을 지나 1리를 가니 오래된 비가 있다고 했는데 대웅전 돌계단 아래의 마당 한가운데에 ‘진감선사비’가 기부의 거북등 위에 무늬가 고운 기단을 마련하고 용두를 이고 섰다. 비석은 깨어져서 더러는 훼손되고 금이 가서 사면의 모서리를 보철로 감쌌다. 고운 최치원선생께서 왕명을 받아 비문을 짓고 쓴 국보 제47호이다.

탁영은 이 자리에 서서 비문의 방서에 ‘최치원봉교찬’이라 쓰인 이끼 낀 비석을 어루만지며 깊은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 모시고 다니며 그의 문하에서 붓과 벼루를 받들고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라며 고운의 은둔생활을 못내 아쉬워했다. 천년하고도 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현세인인들 어찌 고운을 아쉬워하지 않으리오. 하늘도 차마 그를 버리지 못하고 선계로 인도하였으니 찬양지심이야 만고불멸하겠지만 두고두고 선생의 그리움이 석비에서 젖어오고 탁영의 그림자 또한 눈앞에서 완연하다.

 
 


대웅전으로 들었다. 입산고유를 가름하고자 헌향삼배의 예를 갖추고 탁영의 발자국을 되밟으며 금당으로 이어지는 옥천교를 건넜다. 옥천사를 쌍계사로 개명한 이전의 이름이다. 탁영은 비석의 북쪽 수십 보의 거리에 고운이 심은 백 아름이나 되는 회화나무가 실화로 불탔으나 열자(十尺)나 되는 그 뿌리가 계곡을 건너 뻗어서 승려들이 왕래하며 ‘금교’라고 했다는데 금당으로 가는 지금의 ‘옥천교’자리인 것 같다. 옥천교를 건너 층층의 높은 돌계단 위에는 금당과 청학루가 자리를 잡았는데 하안거라 문이 닫혀있어 오른쪽으로 트인 산길을 따라 탁영의 뒤를 따랐다. 불일암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이다. 200m 쯤이나 올랐을까, 진감선사께서 창건한 국사암가는 길과 길림길이다.

국사암과의 산중 갈림길에서부터 불일암으로 가는 길은 낙락장송이 빼곡하여 아찔한 느낌은 아니지만 발끝 아래의 골짜기는 끝을 알 수 없는 수직의 절벽이다. 탁영은 잔도라고 했다. 암벽이 아니라서 산죽이 바닥을 깔았고 노송의 거목들이 울울창창하다. 고요한 산길의 정적을 밟으며 잔도를 지나 너덜겅의 도랑건너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저만치에서 오두막만한 바윗돌이 홀로 걷는 속객을 지켜본다. 고운 최치운선생께서 청학을 타고 지리산을 넘나들 때 청학을 부르던 ‘환학대’란다. 고운은 이곳 환학대에서 ‘진감선사비’의 비문을 지으셨다고 안내판이 일러준다. 바윗돌의 세월이야 천년도 촉각인데 탁영도 이 바윗돌에 앉아 쉬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건만 두류록에는 그 언급이 없다.

환학대를 지나자 훤하게 고갯마루의 천공이 먼동이 트듯이 밝아 왔다. 불일평전에 닿은 것이다. 오래지 않은 날에는 등산객들이 왁자지껄했던 산장이었고 먼 먼 세월의 저편 이맘때는 감자 삶고 옥수수 삶는 냄새가 집집마다 그윽하고 무쇠솥뚜껑 여닫는 소리가 ‘챙그랑!’ 하고 들여올 것만 같은데 인적 없는 폐가는 거미줄만 뒤엉켜 옛 추억에 서럽다. 탁영은 이곳 두고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만한 곳이라며 여기가 세상이 말하는 청학동이라 했다. 그 옛날의 이상향은 어디로 가고 잡초우거진 폐허는 처량히도 허무하다.

고갯마루를 넘어서자 암벽의 허리를 감돌아 이어지는 아찔한 벼랑길이다. 이를 두고 천인단애라 했던가. 머리위로 불거져 나온 암벽은 높이를 알 수 없고 발끝 아래의 수직의 절벽은 깊이를 알 수 없다. 탁영도 원숭이나 오갈 위험천만한 잔도라고 했다. 불일폭포로 이어지는 나무 데크의 계단이 급강하를 하는데 머리 위에 높다란 축대가 한 뼘 남짓하게 좁은 길의 틈새로 보였다. 벼랑위에 얹혀있는 불일암이다. 탁영은 등구사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뿐이었다고 했다. 법당에 들여서 헌향삼배로 입산을 아뢰고 지그재그의 급경사 계단을 타고 불일폭포로 내려갔다. 폭포와 마주한 조망대에 섰다. 비경의 황홀감에 전신이 짜릿한데 청학도 스승도 떠난 지가 오래이다. 先賢已乘靑鶴去, 俗客空見飛瀑留.(선현이승청학거, 속객공견비폭유) 선현들은 이미 청학을 타고 가버렸는데 속객은 부질없이 폭포만 바라보네.

/윤위식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회원)



불일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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