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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의 기행 (95) 난중일기와 남사예담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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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0  23: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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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예담촌.



정유 유월 초하루이면 임진왜란의 막바지인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해이고 삼복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초복 무렵으로 장맛비가 연일 쏟아지는 후텁지근한 날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합천 율곡의 권율 도원수의 군영으로 백의종군하던 이충무공이 옥종 청수역을 떠나 저물녘에 남사에 닿아 하룻밤을 유숙했던 옛집을 찾아 길을 나섰다.

장맛비까지 오락가락하며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꼭 이맘때인가 싶어 서둘러 가면 420년의 세월을 거슬러 남사예담촌에서 장군을 뵐 것 같아 35번 고속도로 단성요금소를 나와서 20번 도로를 따라 지리산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초여름의 가뭄을 끈질기게 견뎌 온 논밭의 곡식들이 장맛비를 흠씬 맞고 산천의 초목과 동색으로 짙푸른 모롱이를 돌고 돌아 물레방아 돌아가는 남사예담촌에 닿았다.

남사리 연혁비가 우뚝한 주차장의 가장자리에는 학자수인 회화나무가 줄지어 섰고 돌담장의 골목길은 옛 내음을 풍기는데 대궐 같은 고택들은 추녀 끝을 마주하고 옛 정취를 품어 낸다. 회화나무 이씨고가, 원정구려 하씨고가, 월강고택 최씨고가, 사양정사 정씨고가, 골목골목 옛 담장에 솟을대문 앞세우고 고대광실 고택들이 온고지정 불러오고 700년 원정매는 새움 돋아 무성하고 600년 감나무는 가지마다 감을 달고 300년 회화나무 서로를 껴안았다.

고택마다 대청마루가 시원스럽게 널따랗고 계자난간을 두른 누마루가 딸려있어 옛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어 연방이라도 갓 쓴 선비들이 도포자락 걷고 앉아 먹을 갈아 시를 짓고 서책 읽는 소리가 들릴 듯도 하거니와 식솔들 불러 세워 천륜인륜 덕목에다 근면검소 근간으로 추상같은 훈계가 이제 막 끝난 것도 같건마는 옛 사람은 간곳없고 부귀영화 흔적만이 옛 세월에 젖어있다.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방앗간떡집과 예담촌찻집 사이로 돌아들면 단속사지의 청계계곡에서 흘러오는 ‘남사천’이 예담촌을 뒤에서 에워싸고 남강으로 흘러간다.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의 곡부에 있는 강인 ‘사수’와 산세지형이 같다 하여 ‘사수천’ 이었고 마을이 ‘사수’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사’라 했다는데 도와 예를 겸비한 선비의 고장이요 충과 효의 마을이다.

거목의 은행나무 아래의 공터에 차를 세우면 사효재와 영모재가 나란히 앉았다. 귀후문이라는 편액이 붙은 나직한 삼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쪽으로 용틀임을 한 500여년의 향나무가 찾는 이를 반기는 사효재이다.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고 아버지를 구한 효성으로 숙종32년에 나라에서 내린 정려를 받은 영모당 이윤원의 효행을 기리고자 세운 재실로서 원형의 기둥에 4칸4겹의 건물로 계자난간에 대청마루와 온돌방을 갖춘 목조고가이고 뒤뜰로 돌아들어 작은 협문을 지나면 단청이 화려한 가묘인 사당이 자리를 잡았다.

사효재와 나란한 영모재로 들어섰다. 조선조 개국 1등 공신 경무공 이제의 성주이씨 재실로서 5칸3겹의 커다란 고옥이다. 솟을대문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1392년 태조원년에 내려진 ‘이제개국공신교서’가 보물 제1294호로 지정됐다는 간략한 안내뿐이다. 경무공 이제는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를 아내로 맞은 부마이고 경순공주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 오라버니 방원에 의하여 생모 신덕왕후 곡산 강씨의 동복동생인 방번. 방석과 함께 부마인 남편을 잃고 동대문 밖의 청룡사로 출가하여 삭발을 하는데 아버지 이성계에 의한 망국의 한을 달라며 불자제가 된 고려 공민왕의 왕비 ‘혜비’가 이미 여승이 되어 기거하니 기구한 재회는 전생현생의 양 업을 짊어지고 삭발 비구니로 함께 살아간 비운의 여인이 아니었던가. 헌향의 예는 사당문이 잠겨서 합장묵례로 가름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비운의 두 여인의 눈물이련가. 소리마저 숨을 죽인 흐느낌인가. 빗줄기는 소리 없이 가늘게 내리고 희뿌연 비안개는 산마루를 덮었다.

 

   
이사재 전경.


충무공의 유숙지로 건너가는 ‘이사교’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마주한 산중턱의 가파른 둔덕위에서 옛 내음이 묻어나는 ‘이사재’가 굽어보는데 남사천 물길 따라 걷는 길의 들머리에 양편으로 마주한 커다란 두 바위가 웅장한 자태로 석문처럼 버티고 있어 예사롭지가 않다. 남사천 바닥에 뿌리를 박고 큼지막한 글씨로 ‘우암’이라 음각된 우뚝 선 바위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같은 크기의 ‘장암’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파묻힌 깊이는 가늠이 안 되는데 우뚝 선 몸집만도 거대하여 웅장하다. 물길 따라 걷는 길의 깎아지른 벼랑 아래 송죽이 어우러진 활엽수의 그늘 짙은 남사천의 깊은 물에 하반신을 담그고 우뚝하게 솟아오른 용소바위가 또 한 점의 산수화로 비안개에 젖어 있다. 이사교 좌측으로는 널따란 주차장을 마련했는데 우리 국악교육의 선각자 기산 박헌봉 선생의 생가지로 대궐 같은 목조와가의 ‘기산 국악당’이 자리를 잡았고 봉긋한 산중턱에 치어다 보이는 ‘이산재’가 산수와 어우러져 병풍 속의 수묵화로 옛 정취가 그윽하다.

이사교를 건너서자 백의종군로의 표지석이 안내판과 나란히 섰다.

이사재는 조선 전기의 토포사의 종사관으로 임꺽정의 난을 진압한데 공을 세우고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지낸 송월당 박호원의 재실이라 안내판이 일러주고 나란한 표지석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권율 도원수의 합천 율곡의 군영으로 백의종군하던 길에 정유년 유월 초하루에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청수역을 떠나 이곳에 이르러 송월당 박호원의 농사를 짓는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고 일러준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둔 여념집이다. 송월당의 후손이 살고 있는 가옥인데 이 자리가 충무공이 유숙했던 박효원의 농사를 짓던 노비들이 살던 집이 있었던 곳일까. 마당을 가로 질러 수직으로 쌓아 올린 높다란 축대를 지그재그의 계단을 오르니까 이사재의 출입문인 ‘거유문’이라는 현판이 달린 작은 대문이 열려 있다. 이사재이다. 벼랑의 둔덕에 자리를 잡아서 마당은 손바닥만 한데 암벽을 등진 삼칸 고옥 이사재는 정적 속에 숙연하다. 대청마루로 오르는 중앙의 마루턱을 오르기 좋게 두 계단으로 층을 지웠고 양 편으로는 계자난간을 둘렀는데 방 뒤로 돌아 갈수 있게 좌우와 뒷면까지 툇마루를 깔았다. 옆 마당에는 장방형의 연못을 팠다. 안쪽 사면을 두 단으로 축대를 쌓아 반듯하게 꾸며 놓은 연당이 정원의 정취를 그윽하게 품어낸다. 뒤뜰의 암벽 밑에는 폭은 한 뼘 남짓한데 가로길이는 한 팔 길이 정도인 바위샘에서 석간옥수가 샘솟고 있는데 옛 사람을 못 잊어서 일까 연당가의 배롱나무는 비에 젖어 처량하다.

대청무루에 걸터앉으니 남사 예담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사천 굽이돌아 남사리를 끌어안아 선현들의 충효절의 만대불후 영원하여 본받아 오늘에 이어 남사예담 이루었네.

오늘은 실비가 내리지만 장군은 난중일기에 정유 유월 초1일 우우(雨 雨)라며 청수역을 출발하여 단성의 박호원의 농노가(農奴家)에서 종일 내리는 비로 간신히 밤을 새우고 초이틀 이른 아침에 단계로 출발했다 하였으니 하늘도 공의 뜻을 꺾지를 못했으며 조반도 들지 않고 물이 더 불어나기 전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니 구국애민의 공의 일념이 가슴을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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