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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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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06  23: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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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54)

“네 딴에는 네가 제일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살았다고 자랑하지만, 소설로 엮으면 책 몇 권은 될 거라고 엄살떨며 다른 사람들도 말하는 그런 범주에 불과해. 앞뒷집 이웃 동네 모두 비슷비슷한 사연이라서 재미없는 내용들.”


 “그게 내가 자랑하는 걸로 들렸어? 그런 괴변이 어딨어.”
 “적어도 내겐 그렇게 들려. 넌 그래도 끝까지 니들을 지켜 준 엄마가 있었잖아.”
 양지는 제 말에 대한 정아의 즉답을 음미했다. 
 “자, 마시고 이번에는 내 얘기 좀 들어볼래? 언젠가는 베스트셀러로 히트 칠 감인데 미리 들려주는 거야.”

 정아가 마주치는 술잔에 양지도 보조를 맞춰주었다. 쨍. 정아가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컵이 깨졌다. 제길, 어쩌고 구시렁거리며 불불 기어 다니면서 수건질을 한 정아가 다시 다른 컵을 가져왔다.

 정아와 양지 두 노처녀는 눈이 퉁퉁 붓도록 어제 저녁 내내 울었다. 온전히 소화시킬 기력도 무시한 채 마구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으레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냉장고 구석에 있는 것들을 뒤져서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안주로 먹었다. 너무 오래 두어서 눅눅해진 오징어와 땅콩을 비롯하여 시들어빠진 오이를 먹었고 양념이 말라붙은 몇 가닥의 김치도 통째로 들어다 놓고 손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이제까지 그들이 보여 왔던 깔끔하고 지적인 면을 송두리째 뭉그러뜨려버린 아주 홀가분한 풍경 가운데 그들은 완전 무임으로 자신들을 방기했다. 웩웩 게우고 있는 상대의 등을 두드려주다가 질펀하게 쏟아져 있는 토사물을 보고 뒤틀려버린 비위에서 거침없이 분출되는 덜 삭은 음식물을 엎어져 있는 사람의 머리 위에다 그대로 토해서 흘려버리기도 하면서. 

 둘은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그런 중에도 나이 많은 여자처럼 정아는 끝없이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우리한테 남은 게 뭐야? 돈이 있어, 자식이 있어, 명예가 있어, 가족이 있어? 있는 거라곤 남들이 상을 찡그리는 노처녀 딱지뿐이잖아. 허점투성이 속내를 봉창하기 위해서 기브스 시킨 거드름에 일상적인 삶조차 불구스럽게 경직되어 버렸고…하하, 있긴 하나 있다. 이 아파트가 누구 건 지 아니? 이게 그래도 입 크다. 내 꿈 내 청춘 다 집어 삼키고 시치미 떼고 있네.”

 게게 흘리는 술침 위로 눈물과 넋두리를 같이 흘렸다. 양지는 물에 잠긴 머리카락을 털어내듯 자주 고개를 내저었다. 정아의 말은 다 맞다. 그러나 긍정하는 순간에 갖게 될 무서운 절망과 허무가 두려워서 입으로 내뱉지 못했던 뼈아픈 고백들이다. 

 순화의 빈소에서도 정아는 동지들보다 여린 심성대로 오열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의 최고에 서서 그 최고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모든 남성들을 다 무시해 주겠다고 만났던 동지들이라 애써 슬픔을 감추었지만 정아는 어린 여학생처럼 제 감정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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