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과 2014년 필자가 사는 인근 지역 옛 선현의 학문과 생가 탐방에 열을 올렸다. 주인을 위하여 충실히 본분을 다 하는 자동차 타이어가 흥얼거리는 즐거운 비명과 함께 하는 나날이였다. 휙휙 스치는 다른 풍경에 차창은 온몸을 떨고 제 몸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변씨 고가’ 라는 적색바탕에 흰 글자가 보이는 순간 자연스럽게 그 곳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와 뜻하지 않은 만남이 이루어졌던 날이다. 마을 초입 당산나무가 몇 백 년을 지켜 온 이 촌락의 안녕을 온몸으로 살랑거리며 ‘그늘’이라는 이름으로 내려놓고 있는 7월이다.
변씨 고가 경남문화재자료 제00호 안내문을 접하면서 고려 말 조선 초 대학자, 그 후손의 세거지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손이 살지 않는 고가를 들어서면서 시간과 공간이 비틀어지고 있음을 안타까이 느껴보았다. 그 상흔을 얼기설기 얽듯이 거미들이 서로의 길을 내어 놓으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 고가 주인이 사랑채와 안채를 드나들면서 불렀던 시(詩)가 풀 섶을 여미고 있었다. 필자는 고가를 두리번거리며 옛 선비의 묵향을 찾고 있는데 불쑥 이 7월의 불청객을 맞이하는 사내가 있었다.
열심히 고가의 숨은 이야기를 한다. 맞장구치며 필자는 궁금한 것을 물어 보기도 했다. 아주 어눌하지만 그 설명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날 필자에게 동행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전혀 못 알아듣는다. 하지만 너와 나는 우리 한옥 건축양식 및 구조가 던지는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 어쩜 저렇게 아는 것도 많을까? 마지막으로 한 곳을 가르켜 손동작으로 마무리 한다 CCTV 라고. 방치되어 있는 문화재의 산 주소이다. 21C의 저 문명이 이 고가를 지키고 있었다. 후손은 아닌 듯 이 촌락에 사는 주민인가 보다. 오늘 이 한사람 지적장애우가 애타게 갈구하며 보존하고 있었다.
작별 할 즈음 “뛰뛰 빵빵?”(승용차로 왔냐?)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손짓 한다 차로 향하여 먼저 길잡이가 되어 준다. 마침 길가에는 승용차가 종대로 주차 되어 있었다. 먼저 뛰어가서 이 차 저 차를 짚어본다 어떤 차가 본인 것이냐고. 그리고 차 문까지 열어 줄려고 한다. 내 마을의 방문객, 더 나아가 우리 고유의 문화를 함께 하는 동지에 대한 애증까지 보인다.
스마트 폰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오늘의 사내들 앞에서, 우리의 문화를 계승하고자 본능적인 의식을 가진 그 사내가 오늘 무척이나 그립다.
박행달(시인·경남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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