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뜰에 풀이 무성하다.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가시박 덩굴이 지붕까지 뻗어 있어 베어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이다. 예초기를 사용하면 수월하게 풀을 베어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예초기가 보이지 않는다. 작년에 벌초를 마치고 토광에 넣어둔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아버지께 물어보자 무덤덤하게 ‘저기 있어’라고 대답한다.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아버지의 손은 허공을 가리키고 시선은 나를 향해 있다. 예초기가 어디 있는지 진짜 알고 있기는 할까? 금방 풀어 놓은 손목시계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데 1년 전의 일을 기억할리 만무하다.
아버지가 젊었다면 어땠을까. 혈기왕성한 장년이었다면, 지금보다 십 년 만 젊어 낫질을 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붕을 삼킬 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풀이 미처 자라나기 전에 쓱쓱 낫을 갈아 베어냈을 것이다.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무정하게 빠른 세월이 야속할까? 풀조차 베지 못할 정도로 늙어버린 자신을 책망할까? 어쩌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다. 팔순의 노인에게 풀이 좀 자라난다고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풀이 자라는 건 자연의 섭리인 것을.
별 수 없이 낫을 사용하기로 했다. 오래 사용하지 않아 녹이 슨 낫을 숫돌에 간다.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숫돌에 바르고 낫에도 물을 묻힌다. 오른 손으로 낫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날의 끄트머리를 잡는다. 숫돌과 각을 세워 낫을 간다. 쓱싹 쓱싹. 낫 가는 소리가 경쾌하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도 새벽마다 낫을 갈았다. 용도에 따라 달리 생긴 여러 종류의 낫을 무디지 않도록 수시로 갈아 주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들고 논두렁의 풀을 베었고 땔감으로 사용할 나뭇가지를 탁탁 베어 왔다. 저녁나절이면 쇠꼴을 한 짐씩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먼저 알고 외양간의 소는 길게 목을 빼고 울었다. 아버지의 지게에 실려 있는 풀에서 싱그러운 여름향기가 풀풀 풍겨 왔다.
이동우(작가·한국언론진흥재단 부산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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