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54>곽재우의 고장 의령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54>곽재우의 고장 의령
  • 경남일보
  • 승인 2017.09.2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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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의병박물관 전경.

◇하늘이 내린 의병장, 곽재우 장군

하늘이 내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9일째가 되는 4월 22일 장군을 따르는 17장령들과 함께 손에 든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털어 병기와 군량을 마련하여 수천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중서부로 진격하는 왜적을 격퇴시킨 의병장이다. 맨 먼저 승전한 곳이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인 기강이다. 신출귀몰한 유격전과 기습공격으로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천강홍의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비롯한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지만, 유생으로 있던 망우당은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신 분이다. 나라가 외침으로 인해 위태로워졌을 때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적과 싸웠던 민병을 일컬어 의병이라고 한다. 이러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왜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숭고한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리고 그 뜻을 새기기 위해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수강생들과 함께 의병 유적지가 있는 의령을 찾았다. 충익사·의병박물관-세간리 현고수-곽재우 장군 생가-첫 승전지 기강나루(보덕각)-망우당 묘소 순서로 탐방하기로 했다.

의령에 도착한 일행은 먼저 장군과 휘하 장령 17명의 위패를 모셔놓은 충익사부터 찾아 참배를 드렸다. 그런데 충익사의 단청이 여느 사당과는 사뭇 달랐다. 그냥 희멀건 색이었다. 윤재환 시인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단청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의병들의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희생’이라는 꽃말을 가진 하얀 목련꽃 색깔로 단청을 했다고 한다. 충익사 앞뜰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과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된 나무로서 수령 500년이나 된 우리나라에서 최고령 모과나무로 가례면 수성마을의 당산목이었던 것을 곽재우 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을 할 때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바로 옆에 있는 의병박물관에는 장군의 유품과 의병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망우당 생가에 있는 우물과 장독대.

◇탐방객들의 근심, 걱정을 다스려 주는 망우당

의병박물관을 나와 승용차로 30분 정도 이동을 해서 망우당 생가가 있는 유곡면 세간리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고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비록 고목이지만 그 자태엔 위엄이 배어 있었다. 수령 520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가 바로 ‘북을 매달았던 나무’인 현고수다. 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매단 북을 치면서 병사들을 훈련시켰을 것을 상상하자, 두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현고수를 지나 장군의 생가에 닿자, 이곳 역시 수령 600년이나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현고수와 함께 이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남쪽 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돌기가 여인의 젖꼭지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가 정성들여 빌면 신기하게도 효험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현고수인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를 마을의 지킴이로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 생가는 2009년 의령군에 의해 새롭게 단장 되었으며, 바깥 광장에는 홍의장군이 말을 타고 호령하는 모습의 조형물과 북을 달아놓은 누각 등을 새로 조성해 놓았다. 생가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하게 꾸며 놓았다. 특히 사랑채 마당에 있는 장독대와 그 옆에 있는 작은 세수소, 그리고 우물정(井)자 모양의 우물이 매우 이채로웠으며, 안채와 사랑채, 곳간의 단아한 품새가 탐방객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주었다. 생가 밖에 있는 두 그루의 노거수와 생가 안에 있는 살림의 규모나 짜임새가 망우당(忘憂堂)이란 호처럼 탐방객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생가를 나서는 필자 또한 복잡한 생각을 비우고, 장군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가는 것 같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첫승전지인 기강나루 옆에 세워놓은 보덕각.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승전한 홍의장군

망우당의 생가를 나온 일행은 장군이 맨 먼저 전투를 치른 기강나루를 찾아갔다.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인 기강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적은 숫자의 의병들로 많은 수의 왜적을 격퇴시켰다고 하니 믿기질 않았다.

병졸들에게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여 옷을 입혀 놓고 횃불을 흔들게 해서 우리쪽 군사의 수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했는데, 이를 보고 지레 겁먹은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옻칠을 한 관 속에 수만 마리의 벌을 넣어서 길가에 버려두자 왜적들이 그 속에 보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문짝을 여는 순간, 수많은 벌떼가 나오자 왜적들이 삽시간에 흐트러져 후퇴하게 한 적도 있었다. 며칠 후에 똑같이 옻칠한 관을 길가에 두자, 왜적들이 두 번은 속지 않으려고 그것을 모조리 불 속에 집어던졌는데, 이번에는 관 속에 벌 대신 화약이 들어 있어서 크게 폭발하여 일개 부대를 완전히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장군은 위장전술과 게릴라 전술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우리 군사들의 손실을 최소화했다. 또한 전투에 임할 때마다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웠고, 항상 붉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홍의장군’이라 불렸다. 장군의 훌륭한 지략을 찬탄하면서 승용차로 40분 정도를 달려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망우당의 묘소에 가서 참배를 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의병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의병탑.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망우당을 떠올렸다. 별시과거에 급제했으나 선조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선비로 은거하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의병을 일으킨 장군, 전쟁이 끝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동강 변에 망우정을 지어 은둔생활을 한 망우당의 삶이 바로 진정한 애국이요, 애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와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고 치유해 주려고 애쓴 망우당의 삶을 되새기는 일도 하나의 힐링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박종현(시인·경남과학기술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지지대로 버티고 선 현고수.
망우당 생가 앞에 선 600년 된 은행나무.
목련꽃 단청을 한 충익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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