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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는 ○○이다김지원기자(미디어팀장)
김지원  |  gnnews@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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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30  11: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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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기자
논개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항상 두가지 주장이 따라온다. 논개는 기생인가 첩인가 하는 물음이다. 기생이었다는 전제의 ‘의기의 순국정신’은 대부분이 동의하는 주장이다. 한편으로 논개가 최경회의 두번째 부인이었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논개는 진주의 관기다(論介者 晋州官妓也)’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문헌에 남긴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논개 이야기는 성내 군·관·민 7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진주성 2차전투의 패배 후 왜군들의 축하연에서 의암에 올라선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기생이어서 혹은 첩이어서 순국의 의미가 더 고귀해지거나 천해지는 것은 아니다.

남성중심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대부분 여인에게 삶이란 누군가의 딸이었다가, 아내였다가, 어머니가 되는 보조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허난설헌 같이 시대에 적응치 못하고 생을 마감하거나, 신사임당처럼 제 이름보다 아들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소모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보자면 논개의 당시 행적이 얼마나 돋보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순국한지 100년이나 지나서, 포상문제가 거론되고, 의기사가 세워지는 등의 특전이 주어졌지만, 여성에게 장옷자락 속에 조용한 삶이 요구되던 시절의 일이고 보면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순국 당시의 기록이 문헌으로 남겨져 있지 않아 우리는 아직도 논개의 직업(?)을 넘겨짚는데 그치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계급사회의 구태를 벗어난 현대에 기생이냐 첩이냐 하는 논란은 400년전 어느 여인이 적장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 사실을 논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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