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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시론]국가 위기, 이순신 장군을 생각한다
김진석(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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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19  18: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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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생각해 보니 나랏일이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자빠지듯 곤경에 처해 있는데, 나라 안에는 구제할 방법이 없는 듯 싶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충무공 이순신이 1594년 9월 3일 전투를 독려하는 어명을 받은 뒤에 쓴 ‘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전쟁 중에 써내려간 일기에는 바람 앞 등불 지경인 나라 걱정이 많다. 이듬해 7월 1일에는 “홀로 수루 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편을 생각해 보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대들보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구원할 기둥이 없으니, 종묘와 사직이 끝내 어찌 될는지. 심사가 어지러워 하루 종일 뒤척거렸다”고 했다.

백성들에 대한 애절한 마음도 남달랐다.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노획한 식량과 옷을 나눠주고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피난민들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적에게 들키지 않게 잘 숨으라고 당부했다. 1594년 2월 9일 고성 현감을 만났을 때의 일기에는 “백성들은 앞으로 어떻게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갈는지”라고 썼다.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에서“백성들은 함대가 나아갈 때 울었고 돌아올 때 울었다. 백성들은 늘 울었다”고 표현했다. 버려진 백성들과 이순신 장군은 하나였다.

이순신 장군은 성웅이다. 성웅의 사전적 의미는 ‘지덕(知德)이 뛰어나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영웅’이다. 그는 이에 더해 숱한 난관을 뚫고 끝내 나라를 지켰다. 한직을 전전하다 1591년 47세의 나이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됐고, 이듬해 임진왜란 발발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지만 모함으로 백의종군하고 수군이 궤멸되자 원직 복귀해 제해권을 되찾았다. 20여회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고 1598년 노량 앞바다에서 철수하던 왜군을 수장시키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선조실록’에서 사관은 “이순신은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었으며, 재능과 지략이 뛰어났다. 군기가 엄하면서도 군졸들을 사랑하니 모든 사람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호남지방 사람들이 모두 통곡했다. 노파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슬피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했다. 훗날 정조는 직접 지은 이순신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우리 열조(공훈이 큰 선조)가 중흥의 공을 이룰 수 있게 뒷받침한 것은 오직 이 충무공 한 사람의 힘이었다”며 “강한(장강과 한수)같이 깨끗한 영령, 일월(日月)과 그 빛을 함께 하리”라고 칭송했다.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국제환경은 급변하고, 북핵문제는 날로 심각해지는데 국론은 분열되고, 탁상공론을 일삼으며 권력만 추구하는 정치권을 보면 임진왜란 때의 조선조정을 빼닮았다. 과연 정치지도자들은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의 처지를 안쓰러워하는가.

이순신 장군은 정의의 외길로 나아간 원칙주의자였고, 바르고 정직했기에 동료와 부하, 백성의 신망을 받아 국난을 이겨냈다. 우리 위정자들도 그를 본받아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원칙을 지키는 데서 길을 찾아야 한다. 이제 지혜를 모아 국정 각 분야에서 산적한 현안들을 풀어 나가야 할 때다. 정치력을 발휘해 국민 역량을 한데 모아야 한다. 그럴 형편이 못되면 백의종군이라도 자임해야 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간 길은 모든 정치지도자들의 초심이 아니던가.
 
김진석(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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