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6 (524)
“할매 내가 이모 디릴라꼬 감자 삶은 것도 말해야지.”
감자가 담긴 양푼을 앞에 놓지도 못하고 경미가 부끄러운 듯 몸을 꼬면서 조모의 옆구리를 어깨로 밀어 붙인다.
“아이고 이눔의 새끼야, 지금 말할 거 아이가. 우리 아게가 이모 디린다꼬 이 꼬막손으로 감자 긁어서 삶았답니더 잡사 보이소. 우리 경미가예 보기는 이리 거저 묵으라는 참외맨치로 쪼맨해도 참 착하고 공부도 잘합니더.”
경미가 양푼을 양지 옆에 놓자 손동작이 어눌한 며느리의 손에다 후후 불어 뜨거운 김이 가신 감자 한 개를 쥐어 준 사장어른은 담쑥 경미를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아이고 내 강아지는 장하지, 이모 오싰는데 뭐 해디릴 거는 없고. 제 딴에는 머리 썼네. 아이구 어른인 이 할미보다 났네.”
서툰 솜씨로 잘 벗기지 못한 감자에는 껍질이 거뭇거뭇하게 남아있어 눈맛으로는 도저히 손 나갈 것이 못되었다. 그렇지만 용재할머니의 권에 못 이겨 감자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서 양지의 입에는 장아찌를 베어 무는 것 같은 맛이다. 양지가 감자 씹는 것을 보고 기분 좋아하는 손녀를 안고 어르면서 할머니는 연방 경미의 엉덩이를 토닥거린다. 티브이 화면으로 보았던 오랑우탄이 연상되는 그들 조손의 원시인 같은 애정표현을 지켜보는 동안 양지는 폐쇄된 듯 가라앉아 있던 자신의 속에서 새로운 어떤 모종이 곰실곰실 자라나는 움직임을 느꼈다.
“사제양반, 이것들이 얼매나 기특한지, 나는 세상에 이것들 키우는 맛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우.”
제 할머니의 칭찬에 녹아 든 아이는 할머니의 앞섶을 주섬주섬 헤치더니 젖을 어루만지기 시작 했다. 쭈그러진 앙상한 가슴을 더듬던 손끝으로 젖을 비집어 낸 아이는 이내 얼굴을 가슴에 박고 젖을 핥아댔다. 땀 배인 입성과 찌든 살 냄새만을 떠올리는 양지의 비위로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짓이었지만, ‘아이고 간지럽다. 이모가 숭보는 디 와 이래 쌓으꼬’ 인사치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할머니 역시 그리 나쁘지 않은지 손녀의 머리통을 뿌리치거나 밀어내지는 않고 오히려 한손으로는 손녀의 허리가 미끄러지지 않게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녀의 머리 쓰다듬던 손을 내려 엉덩이까지 토닥토닥 두드렸다.
“지 앗이 봤을 때, 지에미 대신으로 빈 젖을 물려 재우고는 했더니 질이 들어서, 다 커서 핵교 댕김서도 할미만 보모 젖가슴부터 뒤지니…….”
아이는 아까 느티나무 밑에서 보았던 아이가 저 아인가, 제 손으로 감자를 삶은 아이가 과연 저 아인가 싶도록 천진한 어리광쟁이가 되어있다. 흐잉, 코맹맹이 소리로 응석을 부리면서 한 쪽 손을 뻗어 할머니의 주름진 목을 어루만지는 아이의 통통한 얼굴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그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얘 밑에 동생이 또 있습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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