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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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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1  22: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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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53)

다음 날,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한 양지는 전처럼 참지 않고 호남을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잠들었던 호남은 아직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지를 맞이했다. 양지가 자리에 앉아도 호남은 별 말이 없이 머리맡에 놓여있는 담배케이스를 끌어당겨 속에 든 담배 한 가치를 꺼낸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일 것이라 여겼으나 동작을 멈춘다.

이슥한 시선으로 아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호남의 빨간색 매니큐어 칠해진 손이 금장된 담배케이스 위에서 퇴폐스런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천생 술집 주인으로 태어난 여자처럼 몸에 밴 호남의 일거일동은 자연스럽기까지 해서 양지는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처럼 호남을 바라본다.

호남은 곁에 누가 있다는 생각도 없는 것처럼 팬티로 중요부분만 가린 허연 아랫도리를 감출 기색도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안을 서성거리며 찰칵, 불붙인 담배를 피운다.

양지가 온 이유에 대한 궁금증 같은 건 염두에 없는 태도다. 호남은 단순하고 투명한 사람이라 그의 말을 곡해하고 속상하는 사람만 손해다. 양지는 저 혼자 부풀렸던 서러움을 또 자격지심이라 다독거려야 될 것 같았다.

호남은 습관처럼 입술에 묻은 거스러미를 혀끝으로 튕겨낸 뒤 이윽고 양지를 쏘아보는데 딴 사람이 된 듯 예리한 시선이다.

“대체, 그 아이들 구덕에 입을 거 먹을 거 땜에 할퀴고 뜯고, 뭘 보고 배우겠어. 난 싫어. 우리한테 이세는 미우나 고우나 수연이 하나 밖에 없는데 그 애만은 더러운 것 구차한 것 모르게 키우고 싶어. 그것뿐이다. 언니는 우리가 어떻게 컸는데 꿈에라도 징그러운 그 환경을 잊었단 말이가? 또 용재할머닌 무슨 죄야. 당신네 손자만 해도 머리통이 시끌시끌할 건데 아무리 양육비를 지금보다 배로 더 준다 해도 허락 안할 거야.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데 거절당할 때 서로 불편할 짓을 뭐하러 할끼고.”

호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족한 것 없이 키우는 외자식보다 아웅다웅하더라도 여러 남매들이 어울려서 자란 가난한 집 아이들이 더 인성 따뜻하고 나누는 정도 두텁다는 것을 여러 집에서 보며 느끼고 있었다.

오붓하게 혼자서 다 누리면서 살면 얼마나 넉넉하고 인간다워질 것인가 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자들의 희망일 뿐 사실은 그 반대였다. 욕하고 다투면서도 단합해서 식사자리도 만드는 이웃들을 보면서 눈뜨게 된 세상이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예술가란 경험이 풍부해야 좋은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단다. 어떤 여자 소설가는 실감나는 내용을 묘사할 목적으로 일부러 사창가 생활에 몸담아 보기도 했다더라. 작가만 그러냐? 화가든 누구든 진정으로 감동 받을 작품을 얻기 위해 대개 발로 뛴단다. 이런 말할 자격은 나도 없지만 생각이 경도되면 기계인간 밖에 안 될 것 같아. 나를 봐. 너 알다시피 내가 얼마나 희망 하나에 목매달려 살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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