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남명의 발자취, 경남의 얼굴로<2>
[신년기획] 남명의 발자취, 경남의 얼굴로<2>
  • 김귀현
  • 승인 2018.01.07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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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실천의 표상, 왜 지금 남명인가
<2>‘칼을 품은 처사’ 남명 일대기
<3>지역에서 숨 쉬는 남명의 자산
<4>남명을 연구하는 사람들
 
▲ 합천 용암서원 앞의 ‘단성소(을묘사직소)비’.

남명은 높은 곳을 향해 분개하며 ‘백성은 암험하지 않느니라’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배를 뒤집을 수 있는 물의 힘을 백성에 빗대고, 임금에게 목숨을 건 언로를 올렸다.

평소 그의 허리춤에는 스스로를 일깨우기 위한 성성자(惺惺子)와 경의검이 있었다.

경의검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경의’를 실천하기 위한 고뇌이자 유혹을 잘라내고자 하는 뜻이었다.

남명은 불의와 비판에 맞섰지만 평생 벼슬을 찾지 않았다. 학자로, 스승으로 살았던 그는 일생을 초야에서 보냈다. 제자에게는 ‘처사(慶士)’로 불리고자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나를 태어나게 함은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

조식은 1501년 경상도 삼가현(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과 숙부인 이씨(이국의 딸) 사이에서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었다”고 했던 퇴계 이황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나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한성으로 이사했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조식은 아버지가 장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한성부로 이사해서 아버지 조언형에게 문자를 배웠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는데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함은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하고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했다고 전한다.

그는 유학 경전 외에도 천문, 지지, 의학, 수학, 궁마 등을 익혔다. 동시대 무를 천시했던 다른 선비들과 달리 그에게 문과 무는 선비가 갖춰야 할 균형이었다. 남명에게 이같은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스승 사후에 임진왜란을 맞고 일제히 일어나 조선을 지켜냈다.

 
▲ 남명 조식이 몸가짐을 살피고 성찰하고자 몸에 지녔던 방울 ‘성성자(惺惺子)’.

◇출사를 포기한 기개…후학 양성에 힘쓰다

그는 정통 유학과 제자백가, 노장사상을 두루 접했다. 당시 불교사상을 비롯해 유학사상 외의 탄압 대상이었던 ‘장자’는 성리학자들이 요서(妖書·요사스러운 책)로 취급하며 배척했던 것이었다. 호 ‘남명(남녘 바다)’는 ‘장자’ 소요유편에서 따 지은 것이다.

20세 때 진사 생원 초시와 문과 초시에 모두 급제했지만 생원·진사 회시에는 응하지 않았다. 선사에서 공부를 이어나가던 25세 때 ‘성리대전’ 속 허형의 글을 읽고 난 후 남명은 형식, 학문만을 목표로 한 학문을 내려놓는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에 남명은 벼슬에 단념하고 30세가 되던 해인 1530년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의 신어산 아래로 옮겨가 살았다. 이후 산해정을 짓고 제자들에 대한 강학에 힘썼다.

◇죽기를 각오한 처사의 직언 ‘을묘사직소’

노모가 사망한 해 을사사화로 친구인 이림, 성우, 곽순 등도 세상을 등졌다. 그의 삶과 학문은 고향인 삼가현에 닿는다. 계부당과 뇌룡사를 지은 그는 산림처사의 길을 걸으면서도 불의에 맞섰다. 그는 전생서 주부로 특별 승진하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1552년 종부시 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거절하고 평생 동안 학문에 몰두했다.

55세 때 은거하던 선비는 온 나라에 명망을 떨치게 된다. 1556년 단성 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을묘사직소’는 조정을 진동케 했다.

‘헛된 이름으로 출세를 하는 것보다는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망하여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중략) 자전(문정황후)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명종)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외로운 후사일 뿐입니다’ 온 조정을 얼룩지게 한 사화에도 칼끝은 처사를 향하지 못했다. 재야사림을 대표하는 선비로 우뚝 선 것이다.

조식의 실천적인 학풍에 매료된 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명은 이로부터 4년 뒤에도 조지서 사지로 제수되었지만 사임한다.

◇폐정에 눈 감지 않은 노장, 그가 남긴 뜻

남명은 61세 때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산천재를 짓고 제자 양성에 전념했다. 66세 되던 해 교지가 거듭해 내려오자 임금과 독대한 뒤 귀향했다. 다음해 명종이 승하하고 재차 교지가 내려왔으나 소를 올려 사양했다.

노장의 처사는 68세 되는 해 ‘무진봉사’를 선조에게 올린다. 정치의 도리를 논한 이 상소문은 ‘서리망국론’을 주장하며 임금을 질타하는 내용을 담았다. 관료들의 폐단을 지적하는 한편 민생을 살피라는 직언이었다.

1572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뒤 그에게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그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뜻을 피력했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러한 현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학파와 남인실학파들이 실천, 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학자,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됐다. 그의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때 모두 숙청당하고 만다. 당시 학파는 맥이 꺾였지만 남명의 유산은 후대로 이어져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김귀현기자 k2@gnnews.co.kr


 
‘안으로 마음을 밝게하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검명이 새겨진 남명의 ‘경의검(敬義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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