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장마
  • 경남일보
  • 승인 2018.07.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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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탁 (창원예총회장)
김시탁

장마가 시작되었다. 무더위가 백기를 들었지만 높은 습도가 불쾌지수를 올리고 있다. 끈적한 불면을 베고 누워 백열 형광등의 신경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질긴 밤을 짓씹으니 어금니가 아프다. 퍼석퍼석하고 건조한 일상이 장마에 젖었다. 핏발 선 빗줄기가 세로로 유서를 휘갈기며 맨땅에 정수리를 박았다. 그 죽음의 물결이 도랑을 이루고 강을 거쳐 바다로 흘러가 근육질 파도가 될 것이다.

저수지는 퉁퉁 불어 터진 젖꼭지를 개울마다 물려놓고도 비만의 살들이 넘쳐 논바닥으로 흘러갔다. 아랫도리가 잠긴 채 쓰러지는 벼를 보며 언덕 콩밭 콩들도 콩 콩 콩 발을 구른다. 장마는 분주하고 적막하고 무기력해서 속수무책이다. 무미건조함이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날들의 연속이다. 이럴 때 그리운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자주 오가지 못했으니 무성한 잡초가 길을 덮고 가시넝쿨이 우겨져 질곡의 생은 비탈마다 무심의 이정표만 꽂혀 있을 것이리라. 씁쓸함이 마음이 먼저 달려가는 그리움의 발길마저 휘감긴다. 장마는 이런 빈틈을 노려 칭칭 감긴 일상의 리듬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고개 돌린 그리움 쪽으로 스스로를 굽히고 허공을 휘어서라도 다가가라 권한다.

철벅철벅 빗물 소리가 그렇고 찰방찰방 뱃살이 차오른 강물소리가 그렇다. 서성대고 망설이다 퍼마시는 술잔 속 20도의 투명한 눈물의 톡 쏘는 거룩한 말씀이 또한 그렇다. 그러니 장마가 끝나기 전 안부가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러 떠나보자. 백합이 담장 밑에서 비 흠뻑 맞아가며 일제히 트럼펫을 불며 응원할 때 말이다. 짐 챙길 거 없다. 그저 바삭바삭 말라비틀어진 가슴이나 안고 허기진 내 고백의 양식이나 넣어 기차를 타든 버스에 오르든 미련 없이 가면 된다.

빈손이 맨손을 잡고 궁핍이 빈곤의 어깨를 비벼도 괜찮을 계절이 장마철이다. 축축하게 젖은 것들끼리 한 통속이 되어 잔을 건네고 목탁을 두드리면 장단이 맞지 않는 노래인들 즐겁지 않겠는가. 그리운 안부들과 만나거든 이빨에 고춧가루를 벽보같이 척 붙이고 헤픈 웃음을 잘잘 흘리며 비 맞은 우체통처럼 벌겋게 낮술에 취해도 좋을 일이다. 생 비린내 나는 생을 통째로 짊어지고 삐거덕거리며 버겁게 달려온 시린 관절도 좀 쉬게 하고 말이다.

이 장마철에 경직된 시간을 물렁물렁하게 주물러 희망의 수제비를 끓여 영혼의 배를 채우고 방전된 삶을 충전해 눈부신 내일을 맞이한다면 뜻 깊은 일 아닌가. 장마야 고맙다. 태풍을 동반한들 순순히 맞을 공간 하나 내 가슴에 남아있다.


김시탁(창원예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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