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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길의 경제이야기여성들에게 자유를 입힌 ‘패션계의 혁명가’ - 이브 생-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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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15  21: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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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FRANCE, 1986)ⓒPierre Olivier DESCHAMPS/ Agence VU
Yves Saint-Lau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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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로랑(본명은 Yves Henri Donat Mathieu Saint-Laurent)은 1936년, 프랑스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북부 오랑(Oran)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병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긴 했으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종종 종이 인형을 만들거나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위해 옷을 디자인해주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천재적 데생재능과 예술적 감각을 알아본 어머니의 권유로 빠리 의상 조합 학교(Ecole de la 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 parisienne)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잠시 수학한 그는 1954년 국제 양모 사무국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18세의 나이에 1등을 차지하게 된다. 이를 지켜보았던 보그(Vogue)지의 프랑스 담당 편집장이던 미쉘 드 브루노프(Michel de Brunhoff)가 1955년에 그를 당시 패션업계의 거물이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에게 소개하게 되고,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된다.

1957년 디오르가 갑자기 타계하자, 당시 21세였던 이브 생-로랑이 후계자로 지목되어 디오르의 아트 디렉터 자리를 맡게 된다. 약관 21세의 나이에 빠리 최대 오뜨 꾸뛰르 (haute couture-high fashion-최고급 맞춤복) 하우스인 메종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로, 혜성처럼 빠리 패션계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58년 1월 그는 첫 번째 컬렉션 “트라페즈(Trapeze)”를 선보이며 대성공을 거뒀다. 그렇지만 그는 알제리 전쟁 때 강제 징집 당하게 되었고 연약한 성격 탓으로 결국 3주 만에 신경쇠약으로 전역하게 되지만, 1960년 디오르에서 자리를 잃게 된다.

1962년 디오르로부터 독립하여 이브 생-로랑의 사업 파트너이자 그가 죽을 때까지 늘 곁에 함께한 삐에르 베르제(Pierre Berge)와 공동으로 이브 생-로랑 하우스(La maison Yves Saint-Laurent)를 창설하여 빠리 패션계를 사실상 제패하게 된다. 두 사람은 1961년 회사의 브랜드 로고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 태생의 그래픽 디자이너 카상드르(A. M. Cassandre)를 불러들여 그 유명한 YSL 로고를 탄생시키게 된다. 드골대통령을 하야시킨 1968년 5월 학생 혁명이 있기 전까지는 여학생들은 바지착용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인, 1966년에 처음으로 여성 의상에 바지 정장을 도입하였으며 사파리 재킷을 고안하였다. 또한 그는 1968년에 노브라에 속이 다 비치는 이른바 ‘시스루(see-through)’를 선보이면서 ‘누드 룩’을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는 러시아와 중국 등 오리엔탈리즘의 의상들을 발표하면서 히피 룩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74년부터는 남성복 분야에도 진출하기 시작하여 1981년에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그가 패션계에 몸담은 4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가 발표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킨 의상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예술적 취향을 드러내는 몬드리안 원피스(la robe Mondrian)와 “팝아트(Pop art)” 컬렉션, 르 스모킹, 남성복의 전유물이던 투피스 바지 정장, 기능적인 옷을 멋지게 바꿔놓은 사하리엔느(saharienne), 허벅지까지 오는 부츠, 성 혁명 시기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 등은 파격을 넘어 혁명적이었다. 평소에 이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던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출신의 모델들을 처음으로 패션쇼 런웨이에 세웠다. 모더니스트이자 시대에 발맞춰 움직이는 사람이던 그는 오뜨 꾸뛰르와 함께 리브 고슈(Rive Gauche)라는 이름의 고급 기성복 브랜드를 만들고, 이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 시기에 이브 생-로랑은 모로코의 중부지역 오아시스 도시인 마라케시를 발견하고 그곳에 프랑스 화가 쟈끄 마조렐(Jacques Majorelle)이 조성한 마조렐 정원을 1980년에 매입하고 일반 대중들에게 개방하였다. 2002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가위 혁명적이고 독창적인 작품들로 20세기 후반의 패션을 주도하였다. 그의 천부적인 디자인 능력과 재능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와 존경을 받았고, ‘모드(유행)의 제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8년 6월, 프랑스 빠리 자택에서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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