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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78>겸재 정선의 ‘내연삼용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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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11  03: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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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月輪穿沼水無痕(월륜천소수무흔)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네
(송나라 야보도천 선사의 선시)


 

   
 겸재 정선이 연산, 관음, 잠룡폭포를 그려놓은 ‘내연삼용추’.



버스 좌석에 놓인 문화탐방 안내문에 쓰인 ‘오늘의 화두’다. 진주불교대학 문화탐방 팀과 함께 포항 내연산 12폭포와 보경사 탐방을 떠나는 아침, 잠 덜 깬 필자의 뇌리에 여름 더위만큼이나 뜨거운 화두 하나가 자리잡았다. 무슨 뜻일까? 오랜 참선을 통해 무심(無心)의 경지에 닿은 선(禪)의 세계를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공을 초월한 피안의 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진여(眞如)를 뜻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불꽃같은 예술혼으로 이루어낸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를 뜻하는 말일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화두가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한편, 필자가 오랜 세월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내연삼용추’ 그림에 대해 궁금해 했던 것을 이 화두 속으로 끌어들여 본다면 뭔가 희미하게나마 필자가 찾고자 하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보경사, 절 입구에 선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이미 필자가 품고 있는 화두의 뿌리까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여유로운 자태로 필자를 맞아 주었다. 보경사 경내 결가부좌를 튼 채 말없이 신도들을 맞고 있는 수령 300년 된 반송 곁을 지나 부처님께 참배를 드리고 곧장 12폭포 탐방 트레킹을 시작했다.

겸재의 그림 ‘내연삼용추’ 속의 세 폭포

다른 사람들이 절에서 문화탐방을 하는 동안 내연산 12폭포 탐방을 마치고 오려면 처음부터 서둘러야 할 것 같아 잰걸음으로 트레킹을 시작했다. 계곡을 따라 나 있는 폭포 트레킹 길은 평탄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계곡물이 더위를 모두 실어가 버렸는지, 물소리만큼이나 숲길은 시원했다. 계곡 트레킹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개의 물줄기가 떨어지면서 내는 폭포수 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제1폭포인 상생폭포였다. 폭포수 앞에 서자 속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계곡물 소리가 법어소리로 들렸다면 폭포수 소리는 고승의 사자후처럼 들렸다. 자연이 들려주는 법문이 법당에서 듣는 법문 못지않은 깨달음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포수가 들려주는 시원한 말씀을 뒤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현폭포와 삼보폭포를 지나 마침내 겸재 정선의 ‘내연삼용추’의 배경이 된 잠룡, 관음, 연산폭포에 닿았다. 맑고 깨끗한 감로수가 고인 듯한 감로담과 관음굴이 한눈에 들어오는 관음폭포 위로 난 구름다리를 지나자, 신선만이 즐기려고 감춰 놓은 듯한 연산폭포가 사자후를 토해내고 있었다. 탐방객들은 그 풍경에 압도당한 채 모두 할 말을 잃고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십 길 벼랑인 학소대와 비하대의 비호를 받으며 뻗어 내린 연산폭포는 말 그대로 장관이다. 이 장엄한 풍경이 겸재 정선에게 예술적 깨달음을 주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비경을 화폭에 담아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무념무상에 빠져 있을 동안, 화가는 신선의 경지나 선(禪)의 세계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 훌륭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 또한 화가가 건넨 진여(眞如)의 세계에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선의 세계에 닿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십이폭포 중 제1폭포인 상생폭포.
   
▲ 십이폭포 중 가장 큰 연산폭포.
   
▲ 제6폭포인 관음폭포와 감로담.


그런데 겸재가 그린 ‘내연삼용추’와 실재(實在)하는 세 폭포의 모습은 사뭇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림 속 맨 위의 연산폭포는 아래쪽에서 보면 보이질 않는다. 그래, 예술성 높은 진경산수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단순하게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상상력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풍경에서 받은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한 결과가 ‘내연삼용추’라고 생각하니 새삼 겸재의 그림세계가 우러러 보인다.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달이 연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네’. 지고(至高)한 예술적 경지에 이른 사람은 진여(眞如) 세계와 선의 세계에 닿을 수 있고, 진여의 경지에 이른 사람 또한 예술이 지향하는 지고한 세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자, 아침부터 필자를 괴롭힌 화두의 매듭이 조금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선이 머물다간 내연산 계곡


겸재가 내연산을 찾았던 건 그가 쉰여덟이 되던 해(1733년)에 포항 청하현 현감으로 발령받았을 때다. 2년 동안 청하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한 결과, ‘내연삼용추’, ‘청하내연산폭포’ 등 5편의 진경산수화를 남기게 된다. 이로 인해 내연산은 진경산수화의 발현지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 비하대 꼭대기에 있는 겸재송과 정선송.
   
▲ 신선도 선경에 취했다는 선일대.


연산폭포 왼쪽 비하대 암벽에 ‘鄭敾 甲寅秋(정선 갑인추)’라고 새긴 정선서체가 있다고 하는데, 출입통제구역 바깥에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비하대 맨 꼭대기 겸재송과 정선송이 다른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눈에 담아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신선이 학을 타고 비하대로 내려온 뒤 선일대에 올랐다가 내려다본 비경에 빠져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는 선일대에 올라가 바라본 소금강과 학소대, 비하대와 관음폭포는 그야말로 선경이자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아마 겸재는 이 선경을 그리면서 그림 속 신선으로 살아가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겸재가 그랬던 것처럼 선경에 홀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감상을 하다보니,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문화탐방팀과 합류하기 위해 12폭포 중, 7폭포만 탐방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내연계곡의 시원한 바람을 등에 지고 돌아오는 발걸음,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기분이다. 여름 더위도 닿지 않는 선경에 머무는 동안 누구나 신선이 되나보다. 필자의 몸과 마음이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 계곡을 따라 난 12폭포 트레킹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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