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1>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을 만나다<1>
  • 경남일보
  • 승인 2018.10.0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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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 ‘안수산’과 100년의 삶
우리에게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로 알려진 안수산 여사(1915~2015). 그는 미국에서 중첩된 차별과 억압 속에서도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젠더적 편견과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에서 한 번도 연구된 적이 없었다.

안수산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은 최근 경상대 대학원 사학과 박현순(49)씨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박현순씨는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 연구(A Study of Susan Ahn Cuddy as Korean-American)’라는 논문으로 지난 8월 경상대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현순씨의 논문은 안수산 여사를 연구한 첫 논문으로 당시 화제를 모았다. 결혼 후 20여 년 동안 여성운동단체 회원으로 활동한 박현순씨는 “여성사를 연구해 보고 싶었다. 대학원에서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간과되었던 여성 인물을 찾고자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발굴한 인물이 안수산이었다”며 “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미국 주류 사회에 속한 여성 인물이었다”며 연구 배경을 설명했다. 본보는 창간 109주년을 맞아 박현순씨의 논문을 통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안수산 여사의 삶을 다섯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1>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 ‘안수산’과 100년의 삶

1980년대 후반 미국 여성사의 개척자 거다 러너는 “여성의 역사를 창조하는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오랜 시간 계속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으로 더 많은 여성사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러너의 주장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여성의 역사를 드러내는 데는 인색한 것 같다. ‘코리안 아메리칸 안수산 연구’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던 여성 인물을 드러내고 싶은 의도로 집필되었다.
▲ 1917년에 찍은 안창호 선생의 가족사진. 오른쪽 두번째(머리띠 한 여자아이)가 당시 2살이었던 안수산 여사다. 안창호 선생은 1902년부터 192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미국에 거주했다. 사진 왼쪽부터 차남 안필선, 안창호 선생, 차녀 안수라(안창호 선생이 안고 있는 아이), 장남 안필립, 장녀 안수산, 이혜련 여사(안창호 선생의 부인). 막내 안필영은 1926년 도산이 마지막으로 미국을 떠난 직후 태어났다.

‘안수산’ 우리에게는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딸이라는 수식어로 더 익숙한 이름이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딸이기도 하지만 중첩된 차별과 억압 속에서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미국 주류 사회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진보적인 페미니즘 사상가나 여성운동을 이끈 인물은 아니었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젠더적 편견과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인물이었다. 안수산의 아들 커디(Philip Cuddy)씨는 “나의 어머니는 페미니즘이 부재했던 시대에 살았지만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안수산은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이 정립되기 이전의 시대에 살면서도 이미 페미니즘적인 사상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연구를 진행하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안수산은 1915년 1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여사의 장녀로 출생하여 2015년 향년 10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두 세기에 걸쳐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차별받는 소수인종이면서 미 해군에 자원입대해 아시안 여성 최초의 해군 장교, 미 여성 최초의 항공 포격술 장교가 되었고 미국 해군의 엘리트 암호해독팀의 대위를 거쳐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에서 소비에트 전담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의 안수산은 독립운동가의 딸로서 한국과 끊임없이 소통했고, 동시에 한인 이민 개척자들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미국 내 한인 공동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그의 모든 삶을 할애했다.
▲ 1943년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모의비행훈련학교에서 찍은 안수산 여사의 모습.

안수산은 사회 변혁을 위한 운동을 하거나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성으로서 관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고 중첩된 차별 속에서도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결혼에 있어서도 그는 미국 사회의 일반적 관행을 앞서 나갔다. 대부분의 주에서 ‘인종간결혼금지법(Anti-Miscegenation Law)’이 유효하던 시대에 결혼에 대한 보수적 관념을 타파하고 아일랜드계 백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과 성취는 코리안 아메리칸 공동체뿐만 아니라 아시안 아메리칸 공동체, 나아가 미국 내의 수많은 소수민족 공동체에 희망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로 인해 그는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까지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 역사에서 소수민족의 통합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비중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안수산 생전의 주요 기록으로는 2003년 올해의 여성상 수상, 2006년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 센터(AAJC)가 수여하는 ‘아메리칸 커리지 어워드’ 한인 최초 수상, 2013년 LA다저스 홈경기 중 게임의 베테랑(Veterang of the Game) 선정, 2015년 3월 10일 LA카운티 정부의 ‘안수산의 날’ 선포, 2015년 ‘Born to Lead’ 연극 공연 등이 있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계속되고 있다. 2016년 5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서는 그를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여성 영웅(UNSUNG WOMEN)’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2018년 4월 백악관에서는 ‘아시안 아메리칸 및 태평양 도서지역 미국인 유산의 달’을 맞아 트럼프 대통령 성명에서 “첫 번째 한국인 이민자 부부의 딸로 태어난 안수산이 나라에 대한 확고한 사랑으로 국가를 위해 그의 삶의 사명을 다했다”고 밝히면서 생전의 그의 행적에 존경을 표했다. 안수산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평가들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를 독립운동가의 딸로만 기억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안수산 여사는 해군 대위로 국가통신정보국에서 정보분석가로 활동할 당시인 1947년 4월 25일 프랜시스 커디(Francis X. Cuddy)와 결혼하고 버지니아 알링턴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사진 신혼집에서 찍은 부부의 모습.

논문을 쓰는 과정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처음 연구 대상을 정하고 자료를 모아보려고 했지만 국내에서는 지난 2003년에 번역 출간된 그의 전기 ‘버드나무 그늘아래’ 외에는 별다른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우여곡절 끝에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안수산 여사가 생전에 살았던 집을 방문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2017년 1학기 종강에 맞추어 안수산 여사의 자취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의 집에 보관된 안수산 여사의 자료는 너무나 방대해 보름이라는 기간에 정리하기는 어려운 분량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서로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나는 나의 아들과 동행했고 그는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지인을 초대했다. 석사 논문에 들어가야 할 중요한 내용 위주로 자료를 정리했다. 부족한 부분은 한국에 돌아온 후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기로 했다.

그곳에서 정리한 자료들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 한 학기는 오롯이 자료들을 읽고 분석하는 것에 투자해야 했다. 1940년대부터 현재까지 미국에서 발행된 안수산과 관련된 신문기사들을 읽어야 했고 생전에 여러 기관에서 인터뷰한 자료들과 연극 대본 등을 번역해야 했는데 영문으로 된 자료를 번역하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는 작업 또한 쉽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에서 한 번도 연구된 적이 없는 인물을 논문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었다.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오로지 그간 간행되었던 신문기사들과 그의 전기 인터뷰 등이 전부였다. 인용할 수 있는 이론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분석한 자료만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정리를 해야 하는 작업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논문을 쓰는 동안에도 미국에 수시로 메일을 보내 부족한 자료들과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자료들에 대해 보완을 했다. 안수산의 아들 커디(Philip Cuddy)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논문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온갖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안수산이 평생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존경하며 살았고 아버지의 유산을 한인 2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처럼 그의 아들 역시 어머니의 유산을 전하고 있었다. 논문이 완성된 후 제본이 된 논문 몇 부를 보내면서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더니 커디씨는 외려 어머니가 기뻐할 것이라며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안수산이라는 여성 인물을 알아가는 과정은 묘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안수산은 제도에 맞서 싸우지는 않았으나 보이지 않는 편견이나 관습에는 과감히 맞서 자신의 의지와 능력과 삶의 방식을 관철시켰다. 당당한 그의 모습은 멋졌고 또한 부러웠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비한다면 현재의 우리 사회는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차별이나 억압에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여성들은 여전히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이번 논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인물 안수산을 알게 되고 기억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안수산처럼 보이지 않는 편견이나 관습과 맞서 당당히 자신의 삶의 방식을 관철시켰으면 좋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글=박현순·사진제공=필립 커디(안수산 여사의 아들)



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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