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유적
역사 유적
  • 경남일보
  • 승인 2018.11.13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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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주(전 경찰서장)
강선주

유럽의 역사와 유적을 접하다 보면 복원과 보존에 있어서 우리와 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지역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언듯 보기에는 관리 상태가 허술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훼손된 유적을 복원하거나 관리 하기는커녕, 그냥 방치 하는듯한 인상을 준다. 하물며 유적 내에서 거주하게 하거나 생업을 영위하게 하고 있다. 유적이란 유적은 원래의 모습대로 말끔하게 복원을 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가령 진주성의 경우를 보면 병사 이수일(李守一, 1554∼1632)이 임진왜란 후 성을 보수하면서 종전의 성곽은 너무 넓어 방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좁혀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진주성 규모이다.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고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었다. 1930년대 왜정 때에는 진영 내 못을 매립하면서 진주성 외성 모두와 내성 일부를 헐어버렸다. 1969년부터는 진주성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촉석문을 중건하고 1979년부터는 성내(城內)의 민가 철거를 시작하여 1984년에 마무리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성 외곽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2000년에 마무리하였고, 2002년에는 공북문(拱北門)을 준공하였다

그러니까 수차례의 복원사업을 통하여 현재의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의 모습에 근접하려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임진왜란 이후 진주성의 역사적 모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또, 21세기의 물자와 인력, 기술로 21세기에 복원된 16세기의 진주성모습은 21세기의 유적인가 16세기의 유적인가? 전문가가 아닌 필자는 아리송하다. 그리고 완전히 공원화된 성지애서 원주민들의 삶의 역사와 문화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다소 지나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유적은 잘 단장되고 정돈되어 있기는 하지만 생명이 없는 박제와 같은 인상을 준다면, 유럽의 경우는 무수한 세월 동안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애환을 같이 한 삶의 때와 흔적이 고스란이 남아 있어, 그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고, 또 앞으로도 그런 느낌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 어느 사계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면 역사유적은 “대자연 속의 돌이 인간에 의하여 다듬어져 반드러운 문명의 돌이 되었다가 다시 대자연의 돌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폐허를 볼 줄도 모르고, 느끼지도 못하며, 폐허에 대한 미학조차도 없음을 한탄 한다”고 했다. 문외한인 필자에게도 “문명은 이성의 힘이 아닌 자연의 힘이다”라는 말에 새삼 공감이 간다.

강선주(전 경찰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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