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모 (전 경남일보 국장)
지난주엔 김장철 건강 정보가 지면에 넘쳤다. 주부들이 김장 뒤 무릎 관절염을 얻을 위험이 크다는 등등의 ‘주의보’ 말이다. 노년에 무릎이 많이 시었던 어머니의 기억을 불러오는 활자들이었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도울 이 없던 어머니에게 한 가족의 김장은 해마다 힘든 일이었으리라.
70년대 초까지도 채소밭 귀한 우리 동네 주부들은 무 배추를 받으러 이삼십 리나 나갔다. 어떨 때는 장작을 가져가서 무 배추로 바꿔 이거나 리어카에 싣고 왔다. ‘큰들’까지 나가 김칫거리를 구해오는 일, 배추를 겨울 도랑에 씻어 절이는 일, 한나절 쪼그리고 치대어 독에 쟁이는 일 모두는 딸자식 못 둔 어머니 혼자의 일이었다. 이웃과 품앗이 주고받는 건 봤어도 며느리들이 함께 하는 광경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어머니는 객지의 자식에게 매번 김치 몇 포기씩 담아주셨고 아들은 번번이 손사래 쳤다(결국 들고가지만). 그냥 거절한 게 아니라 나이 오십이 넘고도 ‘우리 김치는 짜서 못 먹는다’는 둥 망발까지 뱉었다. “짐치가 좀 짭아야 오래 두고 먹제” 하시던 어머니의 혼잣말이 귓가에 사무친다.
식구들은 어머니의 김장으로 겨울과 이듬해 봄을 났다. 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우리 김치 맛을 추기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툭하면 “제대로 익어 보지도 않고 시기부터 한다”고 구박하셨다. 나는 다른 아이들 도시락의 노오란 김치와 비교하여 우리 김치는 푸른 잎뿐이냐고 불만이었다.
어머니는 여든을 넘기고도 몇 년 뒤에야 김장을 졸업하셨다. 못하신 거다. 마을 여러 댁에서 노인 대접으로 김장한 날에 생김치 한두 쪽씩 갖다주었다. 자선단체들의 나눔 김장도 왔다. 그렇게 몇 해를 해결하시다가 빈 장독대만 두고 어머니는 그림자를 버리셨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배추김치의 새파란 겉잎을 좋아한다. 아니, 그것부터 먼저 골라서 먹는다. 섬유질이 뻣뻣해도 노란 속잎보다 훨씬 꼬시다. 그 푸른 겉잎 김치를 어린 시절 창피하고 싫다며 징징댔던 거다.
훗날 생각하니 어머니 김장이 내 생애의 가장 맛있는 김치였다. 비싼 황석어나 볼락 대신 김장철에 지천인 생갈치를 토막 내 포기 속 켜켜이 숨기듯 짱박은 김치였다. 짠 덕에 이듬해 김장철까지 시어빠지지 않고 군내만 쿰쿰하던, 멸치 젓갈 맛도 진하던, 진해서 고기보다 맛나던 김치를 나는 어머니 것 이후엔 먹어보지 못했다.
“어머니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습니다!” 생전에 왜 이 말씀 한 번 드리지 못했던가. 이 김장철, 빈집 장독대 앞에서 부질없는 회한에 젖고 또 젖는다.
70년대 초까지도 채소밭 귀한 우리 동네 주부들은 무 배추를 받으러 이삼십 리나 나갔다. 어떨 때는 장작을 가져가서 무 배추로 바꿔 이거나 리어카에 싣고 왔다. ‘큰들’까지 나가 김칫거리를 구해오는 일, 배추를 겨울 도랑에 씻어 절이는 일, 한나절 쪼그리고 치대어 독에 쟁이는 일 모두는 딸자식 못 둔 어머니 혼자의 일이었다. 이웃과 품앗이 주고받는 건 봤어도 며느리들이 함께 하는 광경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어머니는 객지의 자식에게 매번 김치 몇 포기씩 담아주셨고 아들은 번번이 손사래 쳤다(결국 들고가지만). 그냥 거절한 게 아니라 나이 오십이 넘고도 ‘우리 김치는 짜서 못 먹는다’는 둥 망발까지 뱉었다. “짐치가 좀 짭아야 오래 두고 먹제” 하시던 어머니의 혼잣말이 귓가에 사무친다.
식구들은 어머니의 김장으로 겨울과 이듬해 봄을 났다. 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우리 김치 맛을 추기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툭하면 “제대로 익어 보지도 않고 시기부터 한다”고 구박하셨다. 나는 다른 아이들 도시락의 노오란 김치와 비교하여 우리 김치는 푸른 잎뿐이냐고 불만이었다.
어머니는 여든을 넘기고도 몇 년 뒤에야 김장을 졸업하셨다. 못하신 거다. 마을 여러 댁에서 노인 대접으로 김장한 날에 생김치 한두 쪽씩 갖다주었다. 자선단체들의 나눔 김장도 왔다. 그렇게 몇 해를 해결하시다가 빈 장독대만 두고 어머니는 그림자를 버리셨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배추김치의 새파란 겉잎을 좋아한다. 아니, 그것부터 먼저 골라서 먹는다. 섬유질이 뻣뻣해도 노란 속잎보다 훨씬 꼬시다. 그 푸른 겉잎 김치를 어린 시절 창피하고 싫다며 징징댔던 거다.
훗날 생각하니 어머니 김장이 내 생애의 가장 맛있는 김치였다. 비싼 황석어나 볼락 대신 김장철에 지천인 생갈치를 토막 내 포기 속 켜켜이 숨기듯 짱박은 김치였다. 짠 덕에 이듬해 김장철까지 시어빠지지 않고 군내만 쿰쿰하던, 멸치 젓갈 맛도 진하던, 진해서 고기보다 맛나던 김치를 나는 어머니 것 이후엔 먹어보지 못했다.
“어머니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습니다!” 생전에 왜 이 말씀 한 번 드리지 못했던가. 이 김장철, 빈집 장독대 앞에서 부질없는 회한에 젖고 또 젖는다.
정재모 (전 경남일보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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