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 [25]렘브란트 하우스 박물관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 [25]렘브란트 하우스 박물관
  • 경남일보
  • 승인 2019.01.2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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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화가 렘브란트가 올해로 서거 350주년을 맞았다. 네덜란드 17세기 황금기를 더욱 화려하게 빛나도록 만들었던 그였기에 렘브란트에 대한 네덜란드의 애정은 남다르다. 그의 3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렘브란트의 대표 걸작 ‘야경’이 걸려있는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을 비롯해 헤이그 마우리츠 하우스 등에서 특별전시와 이벤트 준비에 한창이다.

특히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서는 올해 2월 중순부터 6월까지 열리는 특별전시에서 박물관 역사상 처음으로 소장하고 있는 렘브란트 컬렉션 400여점을 한자리에 모은다. 또한 올해 후반기에는 렘브란트와 동시대에 활동하며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한 화가 벨라스케스(Velazquez, 1599~1660)의 작품이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건너와 17세기 바로크미술의 정수를 보여줄 예정이다. 올해는 그야말로 렘브란트를 위한, 렘브란트에 의한, 렘브란트의 해이기 때문이다.

마주보고 있는 반 고흐 미술관과 국립 박물관 사이에서 어느 곳을 관람할지 고민하는 관람객이 있다면, 올 해 만큼은 관람객들이 렘브란트를 만나러 국립 박물관으로 먼저 향할 것 같다.

작품을 감상하며 렘브란트의 매력을 느낄 수도 있지만 화가로써가 아닌 한 인간으로써 더욱 다양한 모습의 렘브란트를 만나보고 싶다면 그가 살았던 집에 방문해보자. 암스테르담 중심에 위치한 그의 집은 당시 렘브란트가 단순한 인기만을 누렸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렘브란트는 고작 30대 초반에 이 집을 구입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화가로써 크게 성공한 렘브란트는 자신의 성공을 커다란 집을 통해 자랑스레 드러내고 싶었다.

라이덴(Leiden) 출신 렘브란트는 평생 네덜란드에서만 활동 했던 화가다. 렘브란트가 활동했던 시기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공부하는 것이 유행처럼 여겨져 동시대 화가들이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에 비해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이외의 나라에서 공부했던 기록은 물론 여행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토종’ 네덜란드 화가인 셈이다.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겨 초상화가로써 활동하며 큰 성공을 거둔 렘브란트는 명문가 출신 사스키아를 만나 결혼 하게 된다. 둘은 1639년 현재 렘브란트의 집으로 알려진 이 건물을 구입해 약 20여 년 동안 이곳에 살았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 집과는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여기서 지내는 동안 계속해서 불운의 삶을 이어 나가게 된다.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 못 할 만큼 큰 인기를 누리던 렘브란트가 경제적인 자금난에 시달려 끝내 파산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자금난의 가장 큰 이유는 렘브란트가 이 집을 구입할 때 만든 대출금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 렘브란트의 왕성한 활동과 수입으로 미루어 볼 때 돈을 흥청망청 쓰는 그의 소비습관과 몇 번의 투자에 실패 했던 것도 그 이유로 손꼽히고 있다.

게다가 렘브란트는 낳는 자식마다 세 달을 채 안아보지 못하고 전부 떠나보내다가 네 번째 만에 아들 티투스를 얻었지만, 곧 사스키아와 사별 했다. 이후 렘브란트는 어린 아들 티투스를 돌보는 하녀들과 염문설이 불거져 사람들의 갖은 비난을 사게 되었고, 작품 주문량마저 급감하면서 더욱 고된 삶을 살게 됐다.

안정기에 접어들어야 할 인생 곡선이 말년에 가까워 곤두박질쳐버린 렘브란트는 성공의 자랑처럼 여겼던 저택을 떠나 초라한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그가 가지고 있던 작품과 수집품등의 재산은 전부 경매에 넘어갔다.

20세기 초 까지 만해도 렘브란트의 집은 당대 최고의 화가가 살았던 집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1906년 렘브란트 전시회가 이곳에서 한차례 열린 후 암스테르담 시청이 이 집을 구입하여 1908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었고 내부는 렘브란트가 살았던 17세기 주거 양식을 기반으로 복원됐다. 또한 내부를 꾸미고 있는 가구 등은 렘브란트가 파산 했을 당시 남아있던 그의 재산 목록을 바탕으로 꾸며졌고, 1911년 렘브란트 하우스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렘브란트 하우스는 주방, 작업실, 거실, 견습생 화실 등 여러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공간을 살펴보며 우리는 단지 화가로써의 렘브란트가 아닌 다양한 모습의 렘브란트와 마주하게 된다. 그는 화가임과 동시에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견습생을 가르치던 선생님이기도 했으며 수집가이자 판화제작자이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던 렘브란트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기름에 안료를 섞은 유화였지만 사실 그는 대부분의 일생에 걸쳐 판화 제작에 몰두했다. 당시 판화는 긁어낸 동판에 잉크를 묻혀 나무로 만들어진 프레스에 올려놓고 물기 있는 종이에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 됐다.

렘브란트는 약 290점의 판화를 남겼는데 하나의 동판으로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는 판화의 장점은 유럽 전역에 그를 널리 알렸고 높은 명성과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렘브란트 판화의 특징인 유려한 선의 표현, 명암 표현, 적절한 드라이 포인트의 사용 등은 사람들을 매료 시켰고 많은 인쇄 수집가들이 렘브란트에 열광했다. 특히 렘브란트는 판화에서도 다양한 주제를 동판에 새겼는데 풍경화, 초상화, 자화상, 종교화, 누드화 등이 대표적이다.

빛의 화가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판화작업을 통해 오랫동안 갈고 닦은 명암처리의 내공이 만들어 낸 것 인지도 모르겠다.

판화의 원판은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렘브란트가 보유 하고 있던 원판의 수는 70여 점이었는데, 이 원판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수집가의 소유였다가 파리, 미국까지 건너가기에 이르렀다. 원판이 보존 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는 바람에 원본이 수정되기도 하고, 파손되기도 하며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 졌다. 200년이 지나서야 다시 네덜란드 품으로 돌아온 원판들은 렘브란트 하우스,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등에 소장 됐다. 현재 렘브란트 하우스에서는 렘브란트가 판화를 제작했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해 내며 렘브란트에게 있어 판화가 어떠한 의미였을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하나의 장르나 스타일만을 추구하며 특정한 분야에서만 활동했던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과는 달리 렘브란트는 다양한 스타일과 주제, 재료 등을 사용해 자신만의 세계를 넓혀 나갔다.

지금 한 화가의 작품과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네덜란드로 집중시키고 있다. 작품에서 그의 인생이 보이듯 결국은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이 위대한 화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주소: Jodenbreestraat 4, 1011NK, Amsterdam

운영시간: 월~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홈페이지: https://www.rembrandhuis.nl/

입장료: 성인 14유로, 17세 이하 5유로



 
렘브란트 하우스 전경.
판화 전시실 내부. /사진출처=렘브란트하우스
자화상(1629), 56 x 49mm. 렘브란트 하우스 소장 렘브란트는 32개의 자화상을 동판에 새겼다. 그 중 대다수는 렘브란트가 라이덴에 살았던 초창기 시절에 제작되었고 대부분의 크기가 손바닥 정도만큼 작았다. 렘브란트는 본인을 모델 삼아 표정이나 감정 표현을 동판에 새기며 연습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전성기 시절 그의 자화상을 살펴보면 자신을 귀족으로 묘사하거나 값비싼 옷이나 장신구등으로 치장하고 있다. 즉, 자화상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면 렘브란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드러난다.
판화제작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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