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경남의 3·1 독립운동 (1)총괄
[특별기획] 경남의 3·1 독립운동 (1)총괄
  • 임명진
  • 승인 2019.02.19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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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함성, 경남의 3·1 독립운동
광복염원, 지역도 신분차별도 없었다

 

‘십구일은 진주 기생의 한 떼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 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대한 독립만세’의 함성이 진주를 비롯한 합천, 서울과 평양,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울려 퍼졌다.

나라를 일본의 무력에 빼앗긴 울분은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참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1919년 3월25일 매일신보에는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 이라는 기사에서 진주 기생들의 만세의거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비록 일본의 탄압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천대받던 기생과 걸인까지 나선 독립 만세운동은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2019년 기해년은 외적의 침탈에 맞서 항거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대한의 독립을 갈망하며 소리쳐 외친 그날의 뜨거웠던 함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본보는 당시 도내 곳곳에서 펼쳐졌던 3·1독립만세 운동의 흔적을 찾아 소개하는 지면을 마련했다./편집자 주

◇만세시위…경남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

1919년 3월1일을 기해 일어난 3·1운동은 100만명 이상이 참여한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다.

기록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전국 시위 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5만 명이라고 기록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여러 기록에 의하면 사망 7500여 명에 체포된 인원만 5만여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시작은 서울이었지만 경남지역은 만세시위가 가장 격렬하게 전개됐다.

경남은 남명 조식 선생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남다른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많은 일본인이 거주한 데다 대규모 수탈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국가기록원이 지난 2013년 공개한 3·1운동 피살자 명부를 보면, 경남의 비중이 가장 높은 사실을 확인할수 있다.

1953년에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한 이 명부는 일부 오류가 없지 않겠지만 당시 죽임을 당한 것이 공식 확인된 645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등재돼 있다.

이중 경남이 전체의 29%(184명)로 가장 많고, 경기가 26%(169명), 경북 7%(43명) 등이다.

경남의 만세운동이 색다른 점은 걸인과 기생 등 당시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던 이들이 동참하면서 불을 지폈다는 점이다.

하동은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배포했다.

합천은 지방의 3·1운동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다. 횟수와 강도면에서 가장 강력한 만세운동지역이며 특히 삼가독립만세운동의 경우 여러 면이 연합시위를 전개한 양상을 띠었다.

진주는 서울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중이 결집되었으며 기생과 걸인, 노동 독립단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멸시를 받아왔던 기생과 걸인들이 목숨을 내걸고 만세시위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그외 통영, 의령, 남해, 함양군 등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펼쳐졌다.
◇유관순 열사는 알아도 경남출신 독립운동가는 몰라

진주문화원이 2008년에 펴낸 진주항일운동사에 따르면 경남에서 3·1운동의 시위 횟수는 121회, 약 10만 명 이상이 참가했고 경남 출신 중에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아 공인된 항일 투사의 수는 모두 674명, 그중에 377명이 3·1운동 유공자들이다.

하지만 유관순, 안창호 선생은 기억하지만 경남의 독립운동가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안지호 지사는 고성 출신으로 경남의 3·1운동사에서 유일하게 가장 높은 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인물이다.

3·1운동 당시 함안군 대산면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3월19일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장터를 출발해 군청 등을 지나는 동안 도처에서 일본경찰과 충돌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체포됐다. 마산지법을 거쳐 8월22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7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안 지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했다. 그는 일찍이 1910년 일본 총독에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문서를 3차례 보내고 일본경찰에 체포,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은 바 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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