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⑥사천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⑥사천
  • 임명진
  • 승인 2019.02.2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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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수양공원에 위치한 3.1의거 기적비. 1919년 기미년 사천에서 있었던 만세의거를 기리고 있다.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 학생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축구놀이를 하였다. 이때 이윤조라는 학생편이 이겼다. 이윤조는 드디어 가슴에 품은 태극기를 꺼내어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때 아닌 독립만세 함성에 놀라 뛰어나온 일본인 교장은 교직원을 급히 호출하면서 이윤조를 잡으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이 순간은 은사와 제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애국학생과 침략자와의 대결의 순간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그날을 다룬 경남독립운동소사(상)에 기록된 당시의 상황이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사천지역의 사천공립보통학교와 삼천포, 곤양공립보통학교 등의 학생들이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되찾겠다는 열망으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만세시위를 계획한 것은 사천이 두드러졌다. 그들 중에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폐인이 된 자도 있었다.



◇서부경남 최초…다솔사에서 독립의 기운 무르익다

사천은 진주와 삼천포간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부근에는 비옥한 평야가 있어 농산물과 소금의 집산지로 이름 높았다.

그런 이곳에 지척인 진주장터의 독립만세시위의 소식이 알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황순주와 박기현, 김종철 3인은 3월18일 진주장터 만세시위를 전해 듣고 곧바로 진주로 달려갔다.

그들의 눈에 비친 장터의 모습은 태극기의 물결이었다. 그들은 가슴속에 태극기와 대한의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의 함성을 간직하고 사천으로 되돌아 왔다.

당시 사천지역은 독립만세운동의 기운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3·1만세의거가 일어나기 2년 전 사천의 다솔사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1일 시작된 서울에서의 독립 만세의거 함성은 열흘이 지나 사천지역에까지 당도했다. 서부경남 최초로 3월13일 곤양면 송전리에 사는 김진곤 외 4명은 하얀 종이에 태극기를 그리고 뒷면에는 ‘독립만세’라고 새긴 태극기를 당시 곤양에 주둔하고 있는 일경 주재소에 투척했다.

이어 김진곤 등은 마을주민과 더불어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의 만세시위는 일본 경찰을 무척 당황하게 했고 지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큰 사건이었다. 이들은 급거 출동한 일본경찰과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고 주동인물은 검거됐다.

곤명을 시작으로 3월21일에는 사천읍, 3월 25일에는 삼천포, 4월 5일 곤명, 4월 10일에는 서포에서 연속적으로 의거가 일어났다.



◇첫 골이 신호…학생·관중들 “대한독립만세”

사천보통학교의 만세시위는 이런 분위기 속에 철저히 비밀에 부쳐 계획됐다.

황순주와 박기현, 김종철 3인은 임순백, 윤수상, 김성언, 이윤조 등의 동료 학생들을 규합한 후 태극기 수백여 장을 몰래 만들었다.

의거는 3월21일 전교생이 모이는 학교 졸업식으로 정했다. 졸업식에 앞서 열리는 축구경기에서 첫 골을 신호로 일제히 독립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비밀리에 졸업식날 수백여 명의 학생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등교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들의 계획이 수백여 명에게 전달되는 동안 끝까지 탄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이 학생들에게도 얼마나 사무쳤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기다렸던 첫 골이 터지자, 선수들과 경기를 지켜보던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오후 4시가 되자 읍내로 진출하면서 격화됐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출동했지만 학생들은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이들은 진주읍내의 만세시위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일본 경찰과 헌병들에게 가로막혔다. 이윤조는 일본 헌병에 체포됐고,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은 은신하다가 7일 만에 붙잡혔다. 이들은 은신 중에도 당시 일본 헌병대 사천분견대장의 집에 일제의 야만성과 살육행위를 규탄하는 삐라를 돌에 싸서 투척한 사실이 드러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박기현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고 말았다.



 
사천문화원은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사천 항일독립 운동사를 펴냈다.


◇삼천포에서 불붙은 만세시위

사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의거는 사천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또 학생들에게 가해진 혹독한 고문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더 한층 분노를 안겨 주었다.

4월 14일 사천주변의 도로공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인부 100여 명이 기습적으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함성을 들은 인근 주민들도 시위에 가담하자 순식간에 수백여 명의 규모로 커졌다. 사천읍내로 향하면서 급거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무력진압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사천읍에 가까운 정동면과 삼천포 지역에서도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당시 남양면에 거주하던 박종실은 진주의 강달성, 박진환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삼천포공립학교 교원으로 있던 황병두를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만세시위를 논의했다.

김우열, 강금수, 장지제, 고광세 등과 합심해 의거를 단행하기로 하고, 3월25일 학교의 제1회 졸업식 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들은 3대로 나눠 봉기하기로 하고, 제1대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제2대는 청년대로 하여금 시가의 중심 해안과 백사장에서 봉기하고, 제3대는 일반 시민이 있는 시장에서 봉기하기로 했다.

일본인 교장의 졸업식 훈시에 맞춰 제1대가 학교에서 일제히 봉기하기로 했지만 당일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등교한 학생들이 졸업식을 기다릴 겨를도 없이 박상윤, 박종대를 선두로 일제히 학교를 박차고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은 총칼로 학생들을 구타하고 포박해 연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2대인 청년대는 계획을 변경해 시장에서 봉기했다.

청년대 등 500여 명은 ‘4000여 년의 역사국으로 오늘날 이 지경이 웬일인가! 천부의 자유권은 사(私)가 없거늘 우리 민족은 무슨 죄로 욕을 받는가! 철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의 우리 소리에 바다가 끊고 산(山)이 동(動)하네’ 라는 독립가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간이 지나 만세시위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고광세는 일본의 무자비한 폭행에 피를 흘리면서도 물러섬 없이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일본의 앞장이 조선인 형사 강일선은 주동 인물을 닥치는 대로 검거하고 구속된 애국지사들에게 온갖 학대와 횡포를 다해 사천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격분한 군중들은 3월25일에 이어 26일에도 봉기했다. 삼천포 의거에서 강금수, 장지린, 강천수, 김우열, 장지제, 고광세, 손우상 등이 검거돼 고초를 겪었다.

100년 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어린 나이에도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그들의 애국충절은 사천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매년 3·1절을 맞아 독립만세운동 재현 축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장병석(사천문화원장)

 

[인터뷰]장병석 사천문화원장
100년 전 사천은 경남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의거를 시작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사천의 다솔사에서 1917년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런 사천의 독립만세의거는 당연히 뜨거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학생들과 청년들의 나라 향한 애국심은 오늘날에도 귀감으로 남아 있다.

사천문화원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동안의 숙원사업인 ‘사천 항일독립 운동사’를 펴내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다음은 장병석 사천문화원장과의 일문일답.


-사천지역의 독립 만세의거를 평가해 보자면
▲사천의 만세의거는 3월13일 곤양에서 시작해 서부경남에서 가장 빠르다.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곳으로 민족운동의 성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천의 만세의거는 주로 학생과 청년들이 큰 활약을 펼쳤다
▲사천은 예로부터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고 국가적 일에 늘 앞장서 왔다. 이런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지역의 정서가 밀양과 함께 도내 최초의 3·1만세운동으로 시작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사천의 항일투사가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올해 처음으로 사천지역의 항일투사들의 활약을 모은 ‘사천 항일독립 운동가’라는 책을 내게 됐다. 그동안 우리 문화원의 숙원 사업 가운데 하나였는데 드디어 그 결실을 보게 됐다. 아직 우리 지역에는 100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들의 활약을 재조명해서 사천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 나갈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평가해 보자면
▲그동안 지역의 3·1만세의거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100주년을 맞아 지역의 활약을 조명하고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갈 것이다. 제대로 조명하고 그들의 명예회복에도 심혈을 기울여 나갈 것이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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