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초의 농민운동 ‘진주농민항쟁’
전국 최초의 농민운동 ‘진주농민항쟁’
  • 김영훈
  • 승인 2019.03.1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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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주년 기념식…의의 되새겨
1862년 봉기…농민항쟁 자극제
동학농민전쟁에 영향…의미 깊어
조선시대 말, 국가의 조세제도가 문란해지고 수령과 아전의 비리 그리고 토호층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 무렵 몰락양반 출신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회체제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이 전국 최초로 진주에서 일어났다. 1862년(조선 철종 13년) 2월 14일(당시 양력 3월 14일) 전국 최초의 반봉건 농민항쟁인 ‘진주농민항쟁’이다.

진주시농민회와 진주시여성농민회는 진주농민항쟁 제157주년을 맞아 14일 진주시 수곡면 소재 진주농민항쟁 기념광장에서 진주농민항쟁의 의의와 뜻을 기리기 위한 기념식을 열었다.

올해 처음으로 열린 기념식에는 기관단체장과 농업인단체장, 회원,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주농민항쟁 정신을 되새겼다. 진주시농민회에 따르면 이 항쟁은 진주의 서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덕산장에서 봉기로 막이 올랐다. 이후 농민군은 덕천강을 따라 서서히 이동하면서 세력을 규합하고 항쟁 이튿날 관아가 있는 진주 시내까지 들어온다. 이 무렵에는 진주 외 다른 곳의 농민군들도 합세해 규모가 상당한 수로 불어났다.

이에 당시 진주목사와 우병사가 조선 후기 삼정문란의 폐해였던 도결(당시 토지세)을 취소한다며 증서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미 조정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이들의 시위는 지속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들은 진주목사와 우병사를 둘러싸고 곤욕을 치르게 했고 일부 아전들을 죽임에 이르게했다. 또 이들은 동남방으로 행진하며 농민들을 못살게 굴었던 곳곳의 토호들을 공격하고 2월 23일 고성 옥천사에서 해산했다.

진주농민항쟁은 농민이 중심이 된 최초의 저항운동으로 농민의 변혁운동 시발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지역의 대표 시대정신으로 계승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준형 경상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진주농민항쟁은 단지 수탈에 대한 불만에 의해 폭발됐던 것만은 아니다”라며 “몰락양반 출신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당시 기존의 사회체제를 바꾸려는 여러 방면에서 전개된 민중운동의 흐름이 밑받침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계기로 삼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으로 농민항쟁이 확산되면서 조정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며 “진주농민항쟁은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지고, 일제시기 농민운동으로 발전해 갔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갑상 진주시농민회장도 기념사에서 “진주농민항쟁은 삼정의 문란 등 봉건 수취체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제기했다”며 “이후 계속된 다른 지방 농민항쟁의 자극제가 된 대표적인 항쟁으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 고귀한 얼을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가 열린 진주농민항쟁 기념광장에는 지난 2012년 농민항쟁 당시 희생당한 110여명의 영령을 위로하고 농민항쟁 정신을 되새기는 조형물과 함께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소재지인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창촌삼거리 일원은 농민항쟁이 시작되기 전인 2월 6일 많은 대중이 모여 항쟁의 방향을 정하는 등 여론을 확산시켜 나간 장소다. 진주농민회 관계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며 “2012년 기념탑 건립 이후 이렇다할 행사가 없었다. 이번 기념식을 계기로 해마다 진주농민항쟁을 기릴 수 있는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김영훈기자 hoon@gnnews.co.kr



 
14일 진주시 수곡면 진주농민항쟁 기념광장에서 ‘제157주년 진주농민항쟁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제공=진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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