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
유년의 기억
  • 경남일보
  • 승인 2019.03.1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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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웅(전 진주문화원부원장)
이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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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전 내가 자랐던 고향은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밭둑 어디쯤에 들쥐구멍이 있고, 뒷골 어느 어귀에는 땡벌집이 있었으며, 고얌나무구멍에는 딱따구리가 살았던 것 등 세세한 것 까지 기억난다. 새벽안개가 자주 끼는 고향은 무척 신비감을 느끼게한다. 고향을 그리리워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생텍쥐베리의 말처럼 어릴 때부터 고향산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리라. 소풀을 베던 들녘, 지게를 내리고 잠시 쉬던 자리, 풀꽃 한송이가 예쁘게 피던 자리, 때가 되면 울어대는 찌르레기 소리까지…,

어느 날 나는 지나간 세월의 아쉬움을 삼키면서 느린 걸음으로 고향의 들녘으로 걸어나갔다. 앙상한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나무 중에는 뱀을 잡으면 잘 걸쳐놓았던 옻나무도 있었고 배가 고파 잘라 먹은 찔레도 있었다. 조금 더 갔을 때 산밭 둔덕이 나왔다. 어릴 적, 이 둔덕에는 감나무가 나란히 자랐었다. 지금은 농작물에 나무그늘이 진다고 베어버렸는지 밑둥만 남았다. 그루터기 옆에 앉으니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봄날, 나는 온통 감꽃으로 뒤덮인 감나무 아래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주었었다.

나는 잿빛의 수풀만 덮여 있는 산밭 둔덕에서 연둣빛을 찾아 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직 봄이 일러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고향에 오면 걸음이 느려져서 좋다. 이곳 저곳을 눈여겨 살피며 둔덕을 올라가 이랑을 넘어 가로질러 갔다. 산과 밭의 경계에 있는 도랑에는 얼음 녹은 물이 흘렀다. 그 물소리가 찾지못한 연둣빛 새싹을 대신해주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찾은 듯 반가워 두서너가지를 꺾어려했다. 그러나 이내 손이 부끄러워졌다. 시련의 겨울을 견딘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랑을 건너 산으로 올라갔다. 얼음이 녹아 산길은 몹시 질척거렸다. 나는 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질척이는 황토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온갖 인고와 비애를 넘어선 뒤 흘리는 어머니의 눈물처럼 보였다. 대지는 자기의 품에 수많은 생물을 키워낸다. 그런 생물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멸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죽어 가는 그 생물들의 고통을 모두 들어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준다. 그리고 온갖 수모도 고통도 말없이 감내한다. 그것은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인고의 미덕과 한없는 포용력을 지닌 모습이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새벽 안개, 감나무의 추억, 작은 도랑이 있는 고향의 풍경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편안하고 포근하다.

 

이무웅(전 진주문화원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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