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3·1의거에서 시민운동 싹 텄다”
“진주 3·1의거에서 시민운동 싹 텄다”
  • 임명진 기자
  • 승인 2019.03.2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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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진주시민모임 등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전국최초 소년회·소작인대회·형평사 창립 이어져
지역주민 자발적 참여로 1920년대 사회변혁 추동
진주 3·1독립 만세의거가 1920년대 소년회, 소작인대회, 형평사 등 진주지역 시민·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진주 3·1만세의거는 1919년 3월18일 첫 만세의거를 시작으로 한달여 동안 서울 다음으로 가장 많은 3만여 군중이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걸인, 기생, 백정과 농민, 유림, 노동자,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한 민족시위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22일 진주교회 비전관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선 ‘진주 3·1운동을 다시 돌아보다’라는 주제로 역사적 의미를 집중 조명했다. 역사진주시민모임, (사)진주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조규일 진주시장, 서은애 역사진주시민모임 공동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이 기조 발표를 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진주 3·1운동이 1920년 전국 최초의 소년회와 1922년의 소작인 대회, 그리고 1923년의 형평사 창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되짚었다. 참가자들은 진주 3·1만세의거가 1920년 전국 최초의 소년회를 통한 문맹 극복 운동, 1922년 소작인 대회에서 표출된 불공정했던 농업사회의 모순 타파, 1923년 형평사의 신분제 청산으로 승화, 발전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인 진주 3·1만세의거가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사회변혁운동을 촉발하고 더 나아가 시민·사회운동의 싹을 뿌린 것으로 해석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해야 적절하다는 강연을 했다. 동아시아 혁명의 시대에 3·1운동은 분명히 자주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3·1운동을 혁명이라고 하는 논의가 있다면서 3·1만세의거를 기점으로 제국시대에서 민국시대로 권력의 주체가 넘어가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기조발표에서는 3·1만세의거의 재평가와 후대에 끼친 영향에 주목했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진주지역 근대 역사와 3·1운동’이란 주제로 저항 거점으로서의 진주와 19세기 후반 이후 진주에서의 저항운동과 그 변화에 대한 발표를 했다.

조헌국 전 진주교육장은 ‘진주지역 3·1운동의 전개 과정’이란 주제로 3·1운동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사정을 실증으로 보여 줬다.

김중섭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진주지역 3·1운동과 근대 사회 발전’이란 주제로 1920년 이후 진주 지역에서 생겨난 다양한 사회 단체들의 활동을 되짚었다. 3·1의거 이후에 전개된 진주지역의 사회운동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던 진주지역 주민들의 열의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어 조창래 역사진주시민모임 공동대표, 송준식 한국국제대학교 교수, 조미은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김희주 한국국제대학교 교수 등이 각각 지정 토론을 맡았다.

이번 학술대회는 진주지역의 3·1의거가 지역에 끼친 영향에 대해 본격적으로 재평가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3·1만세의거가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에 그치지 않고 신분제 청산, 불공정했던 농업 사회와 유교 관습, 문맹을 극복하고자 했던 시민운동,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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