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사상과 진주의 사상
지리산의 사상과 진주의 사상
  • 경남일보
  • 승인 2019.04.0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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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문학과 지지학(地誌學)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이른바 ‘지리적 문학(geography literary)’이란 개념이 있다. 진주 지역의 거대한 배경이 되는 지리산을 지리적 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것은 박경리의 ‘토지’ 제1부와 이병주의 ‘지리산’이다. 이 두 작품은 질량의 면에서 매우 웅숭깊은, 한 시대의 대작이라고 평가된다.

이 두 작품에 녹아 있는 문학사상 가운데 하나의 것을 손에 꼽는다면, 이른바 ‘산천(山川)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김윤식 선생께서 제안한 개념 틀이요, 하나의 탁견이기도 하다. 임금을 위한 사상도, 백성을 위한 사상도 아닌 산천의 사상.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그 산천의 사상 말이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서도 이 비슷한 논리가 녹아 있다. 인간의 제도와 이데올로기는 변해도 산천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조국보다 산하(山河)’ 라는 논리를 폈다가, 무정부 내지 반(反)정부를 선동했다는 사상의 의심을 받고 옥살이를 했었다. 어떻게 보면 ‘조국보다 산하’의 논리 내지 사상은 박경리적인 ‘산천 사상’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다고 하겠다.

나는 며칠 전에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의 소설 ‘관부연락선’에 관해 주제 발표를 했다. 지리적인 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에서는 동경과 진주라는 두 지역이 소설 줄거리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있다. 이 소설은 일부분이 동경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대부분은 해방기 진주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지리산의 사상이 장풍득수를 배경으로 한, 매우 포용적인 의미의 일종의 산천의 사상이라면, 이를테면 진주의 사상은 거점의 사상이라고 하겠다. 거점이란, 활동의 근거가 되는 지점 말한다. 진주의 사상은, 군주를 위한 사상도 아니요, 백성을 위한 사상도 아닌 것. 둘 중의 하나가 선택되어야 하는 것의 사상이다. 김시민의 충절과 논개의 항거(순국)는 군주를 위한 사상이요, 진주민란이 19세기 전국 민란의 도화선이 되고 형평사 운동이 백정 해방의 첫 번째 기치를 밝힌 것은 백성을 위한 사상이다. 소설 ‘관부연락선’에서 유태림이 교사로 재직하던 혼란한 해방정국의 진주는 좌와 우를 선택해야 하는 소위 거점의 사상이 자리하는 공간이었다.

이 소설의 본문에 의하면, 진주는 촉석루를 중심으로 남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백사장과 죽림이 펼쳐져 있고, 망경산과 비봉산이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에 잠입해 머잖아 여성 빨치산이 될 서경애의 눈길은 서상대에까지 미친다. 그녀는 진주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감탄하고 있다. 진주가 영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성을 지닌 곳이라는 평판은 이미 고려시대의 문헌인 ‘파한집’의 첫머리에도 나오는 얘기다. 진주는 예로부터 ‘산하금대’의 자연 풍광으로 유명한 곳. 예제의 뭇 산은 옷깃을 세운 듯하며, 남강의 흐름은 마치 띠를 두른 것 같다. 진주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물류와 유통의 거점이 되고, 또 사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도 모이거나 스쳐 지나가기 용이하다. 그리하여 시대의 격랑에 휩쓸린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강잉히 무장된 이데올로기 앞에는 경관의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산천의 의연함이 무엇이고 간에 그 압도하는 힘에 미치지 못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 한 시대를 성찰해 본다. 전체를 아우르며 포괄하고 포용하는 소위 지리산의 사상이 실종한 가운데, 오로지 좌우의 거점을 확보하려고 가파르게 대립하고 충돌하던 해방기, 한국전쟁기에 있어서 진주의 사상이 시의적으로 유효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극단으로 치우지지 않는 중간자 유태림의 삶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나 했을까, 하고 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지리산의 사상인가, 진주의 사상인가. 내 생각으로는 무사한 시대에는 전자가 입지를 마련할 것이요, 난세에는 물론 후자가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보인다.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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