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잊지 말아야 할 민중의 힘
[그때 그시절]잊지 말아야 할 민중의 힘
  • 박은정
  • 승인 2019.04.17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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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의 경남일보는 4·19혁명의 전개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울 등 기타 도시는 연합뉴스를 받아 보도했지만 마산은 이상정·윤표 두 특파원이, 부산에는 김영수 기자가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7일자 1면 드디어 민주당과 민총공명선거위 주최의 데모대가 발표한 선언문을 담고 있으며,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대학생 등도 데모대에 합류 시청 앞 광장으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다.

9일 1면 민주당 선거무효소송 11일 제기하기로 하고 8일에 소송대리인을 선정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마산사건(김주열 열사)에 대한 관계자 본인 진술을 들은 후 징계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2단 기사로 자리 잡고 있다.

10일자 1면 마산사건에 대한 국회조사위의 보고서를 여야 주장 따로 넣기로 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내용을 보면 사건의 핵심 첫 의제부터 대립하기 시작한 여아 조사위원들은 서로 상반된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어 일치되는 부분과 대립되는 부분을 각각 따로따로 넣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사태는 진정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데모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1일자 1면 갈수록 거세지는 투쟁의지를 엿 볼수 있는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정부 여당에서도 불법 부정을 폭로하고 투옥을 각오로 투쟁을 전개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같은 날 2면에는 9일의 진주거리에도 경찰의 경계망이 펴져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4·6 서울데모, 그리고 9일의 부산 데모의 여파가 미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예방책의 일환으로 시내 각처에는 정·사복 경찰관과 중·고교 교직원들도 순찰을 돌고 기동경관을 태운 차량들이 수회에 걸쳐 시내를 순회한다는 내용이다.

한편 부산에서도 민주당원이 ‘마산사건의 진실을 밝히라’는 삐라를 뿌리며 데모를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13일자 2면 두 번째 마산서 유혈데모가 있었다. 시가는 암흑천지로 변하고 데모군중은 일시 경찰관서를 점령해 경찰과 군중 쌍방이 수 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는 기사가 톱으로 올라가 있다.

14일자 1면 톱기사에는 마산에서 국민학생도 데모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연 3일째 계속되는 데모는 저지되고 경찰관의 배치로 살벌해진 시가지의 분위기도 전하고 있다. 그 옆으로는 장면 부통령이 이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이대통령 측은 대단히 바빠서 만나기 어렵다고 답했다.

또 부산에서는 마산까지 김군의 살인자를 찾아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마산까지 도보 데모를 감행하려던 민주당 경남도당의 계획이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마산의 데모는 연일 이어지고 경찰당국의 강경태도로 공포 속에 최루탄도 발사되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남녀학생 1000여명은 계획된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데모를 비방한 두 여인이 뭇매를 맞고 옷이 뜯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주열 군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마산도립병원 앞을 지나던 여인이 “마산학생들이 너무 한다”는 말에 흥분한 군중들이 봉변을 주었다고 한다.

15일자 1면 김주열 열사의 사체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짧은 기사가 실려 있다. 그의 시신을 실은 앰뷸런스가 그가 공부하던 동네를 한바퀴 돈 후 고향 남원으로 향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2면에는 김군의 시신을 해부한 결과 최루탄에 의한 사인이 알려져 있지만 민주당 측에서 x선 촬영을 근거로 사인이 의심되고 있다는 기사도 보인다.  

16일자 1면에는 마산사건의 본격적인 질의전이 펼쳐지며 국회서 법무차관을 출석시키고 부정선거주범을 재판에 회부 시킬 것을 요청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에 신차관은 제1마산사건에 대한 경찰의 과잉방위를 인정했으며 김주열의 사인은 최루탄 때문이라는 부산지검장의 증언도 소개됐다.

2면에 보도된 내용들은 경비는 여전히 삼엄하지만 정상화된 마산시내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또 14일 밤 진주농대 뒤 도로에서 3·15선거 불법이란 삐라가 뿌려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마산에서의 데모가 진정을 보이는 사이 인근 지역인 진주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17일 2면에는 진주농림고 등 학생들이 일제히 데모를 감행할 기세를 갖추고 있어 불안한 공기가 감도는 시내 표정을 스케치하고 있다.

19일 제2 마산사건의 원인이 된 김주열군의 사체를 사후 오랫동안 은닉한 후 바다에 던져졌다는 사실이 17일 국회조사단에 대한 관계자 증언이 나왔으며 눈에 박힌 최루탄이 사후에 박은 것이며 김 군에게 고문당한 흔적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마침내 19일 낮1시경 학생, 시민 10만여 명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무차별적 실탄 사격 감행했다. 오후 5시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 비상계엄 선포. 이날은 부산, 광주, 대구, 전주, 청주, 인천 등 거의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데모가 일어났다.

마침내 27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 사임서 국회 제출했다.



 
1960년 4월 19일 1면 본보 지면.


◇4·19 혁명(1960년 4월 19일)

59년 전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바로세운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항해 선거일 당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어졌고, 당시 실종된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체로 발견됐다. 이는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되었다. 시위는 서울과 부산 광주 등지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한달여 가까이 지속되는 시위에 서울의 치안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19일 오후 3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출동시켜 학생 시위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게엄령 선포와 함께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전국적으로 186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무력에도 굽히지 않는 시민들의 분노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게 되었다. 4·19혁명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중고생과 대학생, 국민학생까지 참여했다. 희생자 중 가장 어린 학생은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고 한다. 시위는 한 달을 넘겨 전국적으로 계속되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독재정권과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꽃다운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들어낸 희생의 결실이 바로 4·19혁명이다.

박은정 편집디자이너



 
1960년 4월 20일 2면 본보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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