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지역 4·19혁명의 숨은 이야기
진주지역 4·19혁명의 숨은 이야기
  • 최창민
  • 승인 2019.04.3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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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민(편집국 취재부 부국장대우)
최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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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출신의 허만길 선생은 1950년대 진주에 살았다. 비봉산 아래 허름한 쪽방촌을 전전하며 그야말로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으로 진주중학교를 다녔다.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창창한 꿈이 있었기에 희망을 잃지 않았다. 진주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는 1960년 4·19를 맞게 된다. 독재와 부정부패, 3·15부정선거에서부터 촉발된 4·19혁명은 학생들을 그냥 학업에만 열중할 수 없는 환경으로 내몰았다.

본보는 최근 그에게서 진주지역의 4·19혁명에 관해 들을수 있었다.(4월 19일자 1면 보도)

정리하면, 진주사범 학생회위원장이었던 그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 직전인 1960년 4월 24∼25일께 진주고, 진주농림고, 해인고, 진주여고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다. 참여학생은 5000여명, 충돌을 막기 위해 시위 도중 류사원경찰서장을 찾아가 ‘발포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는 사상자 없이 부정선거의 부당함을 효과적으로 시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어진 시위, 진주극장 앞에 선 이들은 “만세”를 부르는 환영 인파 속에서 선언문을 발표했다. “학도여! 저 푸른 하늘을 향해 마음껏 소리 높여 봅시다. 이제는 우리 대한 국민, 배달민족이 스스로 새 길을 찾아 나섰다고…(하략)” 총을 든 삼엄한 경찰경비 속에서도 단 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26일 오전 10시 20분, 하야를 발표했다. 진주의 대규모 궐기 직후의 일이다.

그는 뒷얘기를 들려주었다. 먼저, 4·19 때 진주는 조용했던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에 대해 평소 안타깝게 여겼는데 언젠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사실을 지역신문에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마산지역 학생, 시민시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횟수와 규모면에서 작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경남 부산지역신문을 검색한 결과, 하야발표 이전인 17일부터 진주에도 학생들과 민주당원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고, 23일부터는 고교 휴교, 25일 고교생과 진주농과대학생들의 1000명 이상 시위, 26일 5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16∼18세의 어린 나이에도 학생들의 판단은 얼음처럼 냉철했고 열정은 화산처럼 뜨거웠다고 했다.

그는 진주극장 앞 연단에서 목청껏 외쳤던 ‘선언문’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육필로 쓴 선언문을 수년전까지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으나 지질이 좋지 않아 훼손됐다고 했다. 다만 언젠가 쓸 일이 있으리라 판단하고 기록해 놨던 것이 신문에 게재됐다고 했다.

경남일보에 관한 얘기도 했다. 당시 궐기에 관한 사설(社設)이 게재됐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진주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일어났으나 타 지역에서처럼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관제데모성격이 짙다’는 내용이었다고. 이 보도를 접한 학생들과 교사들은 발끈해 신문사를 항의 방문했었다. 하지만 주필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 것으로 기억한다고도 했다. 본보는 이 기간 신문이 망실됐음을 확인됐다. 허 선생은 신문 망실에 대해 아쉽다면서도 하지만 경남일보가 4·19상황을 지금이라도 기록에 남김으로서 지역신문의 소임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4·19혁명 때 진주지역 학생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았으며 평화시위로 인해 사상자 없이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한 것에 의미를 찾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영원토록 숙명처럼 지켜가야 할 가치이자 아주 소중한 유산”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생존한 석학으로부터 진주의 4.19혁명에 대해 듣는 일은 참 기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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