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0]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0]
  • 경남일보
  • 승인 2019.05.1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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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역사 박물관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유대인

17세기 암스테르담은 전 세계에서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항구도시로 각 국에서 온 상인들로 넘쳐났다. 항구 주변은 이방인들과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국적인 물건들로 가득 메워졌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암스테르담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이 가능한 도시’라고 묘사하며 암스테르담의 국제적인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데카르트가 남긴 명언 ‘나는 생각한다,고로 나는 존재 한다’이 실린 ‘방법서설’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 됐다.

도시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자유롭게 펼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었고 암스테르담은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 과학, 예술에서도 커다란 발전을 이루며 빠른 속도로 유럽 중심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도시의 발전은 먼 땅에서 박해받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인 곳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은 점차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떠나온 유대인들과 프랑스계 위그노 교도들 때문에 계속해서 인구가 급증했다. 도시에는 그들을 위한 커뮤니티가 생겨났고, 이국적이고 다양한 문화들이 곳곳에 자리 잡기 시작 했다.심지어 암스테르담에서는 네덜란드어보다 포르투갈어,이디시어(유대인어) 등을 더욱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주민들이 네덜란드 시민권을 얻는 과정에서 필수로 배워야 했던 네덜란드어는 낯선 땅의 적응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들은 곧 네덜란드 문화에 익숙해지며 사회의 일원으로 동화되었다.

고대 히브리인들로부터 기원한 민족인 유대인은 유대공동체를 이루고 살며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에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등 유대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에서 배척 받았고, 토지를 소유하거나 농사를 짓는 일 등을 할 수 가 없었으므로 고리 대금업 같은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구교에서 신교(프로테스탄트)국가가 된 네덜란드는 종교에 대한 엄격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심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다른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유대인들이 유대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에 정착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었고 곳곳에 유대교 회당이 생겨났다. 이후 18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가 대두되어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1900년대 암스테르담 인구 10명중 한명은 유대인이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현재 유대인박물관과 유대교회당 근처에 생활터전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상업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은 종교보다 사업과 무역거래를 더욱 중요시 여기는 암스테르담에서 오랫동안 중심 역할을 했다. 유대인들이 혹독하게 탄압 받았던 시기는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나치로부터의 탄압이었다. 1941년부터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하기 시작한 나치는 많은 유대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고, 약 13만5000명의 유대인들 중 10만명 이상이 홀로코스트의 비극에 희생되었다.



 
 


◇철학자 스피노자

철학자 스피노자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나가고 있을 무렵,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해 온 유대계 부유한 상인이었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유대교에서 이단이라고 여겨지던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신학, 천문학 등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다루는데 몰두 했다. 스피노자는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대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에는 모순이 있다고 여기며 신은 자연 그 자체여야 한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사상은 결국 그를 유대교에서 파문 당하게 만들었고 부모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유대교에서의 박탈은 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했고, 곧 생계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그의 사상을 부정하는 반대세력으로부터 살해위협을 당하게 되자 은둔 생활을 하며 렌즈 깎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는 스피노자가 렌즈를 가공할 때 발생되는 유리가루를 많이 마셔서 폐질환의 악화로 짧은 생을 살았다 설이 유력하다.



 
 


◇유대인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한눈에

네덜란드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유대인 역사 박물관은 유대교의 전통과 문화의 이해를 돕는다.

1932년에 개관한 이후 제 2차 세계 대전 으로 인해 문을 닫아야 했고, 소장품의 상당부분이 유실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박물관은 네 곳의 유대교 회당이 있던 현재 위치로 이전하며 약 1만1000여점의 미술품, 의례품, 역사적인 유물 등을 소장 하고 있다. 박물관이 유대교 회당의 내부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고 있어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더욱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특히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어떻게 네덜란드 사회와 통합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 보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유대인 역사박물관에서 구입한 통합티켓은 한 달의 유효기간을 가지며, 유대인들의 전통 및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다음의 장소에도 방문 할 수 있다.

유대인 문화 구역의 중심에 위치한 포르투갈 시나고그(유대교회당)는 1675년 건립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유대교 회당이었다. 현재도 예배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대중에게도 개방되고 있다.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분위기의 내부는 전기 없이 자연광과 수백 개의 촛불로 밝혀져 있다.

과거에는 극장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들을 독일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하기 전 감금 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현재는 1940년에서 1945년 사이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국립 기념비가 있는 추모관이다. 국립 홀로 코스트 박물관은 교사 양성 학교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학교 옆에 위치했던 어린이 보육원은 나치의 통제에 들어갔고, 유대인 아이들을 부모와 강제 이별 후 수용소로 이송될 때 까지 감금되었다. 보육원과 교사학교 선생님들이 힘을 모아 비밀리에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수 백 명의 아이들을 구출 해냈다. 역사적인 장소에 설립된 박물관은 각종 전시와 강연, 학회 등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대한 교육과 지식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유대인들에게 이디시어로 ‘장소’ ‘안전한 피난처’를 의미하는 ‘모쿰’으로 불렸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 사회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한 암스테르담은 20세기를 거치며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잔인한 희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공동체를 재확립 하려 꾸준히 노력했다. 암스테르담의 전(全) 시장 잡 코헨(Job Cohen)은 유대인 출신이었으며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여 세계적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은 바 있다.

 
 
 
 


주소: Nieuwe Amstelstraat1,1011PL, Amsterdam

입장료: 성인 16유로, 청소년 8.5유로

입장시간 : 11:00~17:00

홈페이지: https://jck.n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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