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1)
[특별기획]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1)
  • 임명진
  • 승인 2019.07.01 0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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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협박 “진주성을 비워라 그러면 산다”
“진주성을 비워라. 우린 성만 함락하면 된다”

진주성의 상황이 시시각각 급변했다. 일본이 전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다시 치려하자, 강화협상에 나섰던 명군은 깜짝 놀랐다.

명군은 진주성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주목할 점은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강화협상에 나선 명의 사신, 심유경에게 진주성을 비울 것을 통지했다는 점이다.

‘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본부(명의 사신 심유경)를 보고 말하기를, 진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공격의 예봉을 피하게 하라. 공격하는 일본군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즉시 철병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최경회가 왜적의 진주 공격을 알리는 심유경의 전첩 내용을 보고한 내용이다. 밑줄 그은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 부분이 적장 고나시유키나가가 강화협상에 나선 명 사신심유경에게 진주성을 비우라고 통지한 내용. /자료제공=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일본, 왜 진주성을 비우라고 했나

여기서 왜, 적장 고니시가 강화협상에 나선 명의 대표에게 “진주를 함락하면 더 이상의 공격 목표가 없다. 성을 비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했는지, 그 연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넌지시 흘려준 말이라고 할지라도 강화협상의 일본 측 대표가 상대 협상자에게 이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비춰진다.

계산된 언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성을 비우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의 사신 심유경이 고니시로부터 이 말을 듣고 조선군의 도원수 김명원에게 통지한 것은, 기록에는 5월 24일이다.

일본군이 6월15일 이미 군대를 이끌고 김해와 창원을 경유해 진격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의 연락체계를 고려했을 경우 실제로 성을 비울 것인지 여부를 조선조정이 제대로 논의하기에는 턱없이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조선군이 성을 비우기도 사실상 어려웠다. 진주성이 어떤 성인가? 호남의 길목이자, 지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곳이다. 조선군의 힘으로 일본군을 막아낸 곳이다.

그래서 진주성에는 적지 않은 군량미가 비축돼 있었고, 경상도와 호남의 의병들이 진주성을 통해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그런 진주성을 포기하는 것은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성을 비운다면, 곧바로 철수하겠다는 연막작전을 펼쳐 명군의 적극적인 개입을 차단하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실제 명군은 진주성이 포위되고, 조선정부의 지속적인 출병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진주성 2차 전투는 이런 명나라의 무책임한 태도가 크게 한몫했다. 애당초 조선군의 의지대로 남하하는 일본군을 맹렬히 추격하고 견제했더라면 수세에 몰려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선의 반대에도 강화협상에 나섰던 명군은 오히려 성만 비우면 된다는 일본의 술수를 조선에 그대로 전달하며 거들었다.

선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진주성 함락직후 선조는 ‘진주성이 화친을 주장한 명의 사신 심유경 때문에 함락 당하였으니 격분함을 견딜 수 없다. 심유경이 화친을 주장하여 일을 그르친 내용도 언급하라. 중국 조정에 그의 잘못을 알려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명의 잘못된 판단이 사실상 2차 진주성 전투를 야기했다는 조선조정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일본은 명군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교란작전으로 ‘성을 비우라’는 공성론을 내걸었고,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하면 명군과 조선군이 맞대응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투 생리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 전략들이 맞아 떨어진 셈이 됐다”고 말했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8일 비변사가 ‘심유경 등의 일을 배신의 정문으로 알리자’고 아뢴 내용. 빈청이 회계하기를 “심유경이 적을 도와 나라를 그르친 정상과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끝내 귀순할 리가 없다는 것을 주본(奏本)에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 것이 사체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배신(陪臣)의 정문(呈文)은 제주(題奏)와는 다르니 유경와 수길의 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정문(呈文)하여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속히 정문을 지어 황진에게 보내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자료제공=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일본의 치밀한 준비

그렇다면 일본군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일본군이 얼마나 진주성 2차 전투를 치밀하게 준비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오히려 일본은 진주성 방어를 위해 수많은 조선의 장수와 의병들이 모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일본군은 진주성이 그들을 괴롭히던 의병들의 본거지라고 여겼다. 그래서 지난 1차 전투에서 3만의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쳤다.

자신들의 배후를 괴롭히는 의병과 조선군을 한 곳에 모아 승부를 내겠다는 고도로 계산된 일본의 전략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2차 전투에 동원한 10만이 넘는 일본군의 군세는 실로 엄청났다.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육군 외에 도도 다카도라 등이 이끄는 수군도 가덕도 까지 들어갔다.

이른바 수륙합동작전이었다. 진주성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조선에 주둔한 전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그런 이 10만 병력이 진주성이 비어 있자 그대로 다시 부산으로 회군한다는 논리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약 진주성에서 패하거나,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잃는 것이 더 컸을 것이다. 사실상 일본의 조선침략은 진주성에서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일본의 의도대로 명군은 개입하지 않았고, 진주성은 함락됐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어찌 보면 진주성 2차 전투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기회였을 수 있다.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치는 바람에 부산 본거지에는 수천의 수비 병력밖에 없었다. 그때 부산의 본거지를 쳤더라면 정유재란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명군이 손실을 우려해서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그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다시 진주성 재침을 명령한 도요토미, 일본의 입장에서도 전쟁의 명운을 건 반드시 이겨야 할 전투였던 것이다.

이처럼 진주성 2차 전투는 일본의 치밀한 준비와 명의 방관 속에 10만 명이라는 압도적인 적을 상대하게 됐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일본) /사진제공=국립 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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