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전투(2)
[특별기획]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전투(2)
  • 임명진
  • 승인 2019.07.0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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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지언정 진주성을 포기할 순 없다
 
진주성 전쟁지휘소인 촉석루에서 서문방향으로 바라본 광경. 남강을 낀 진주성벽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강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곳곳에 해자를 파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진주성의 경보가 날로 급하므로 창의사 김천일, 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및 여러 의병들이 함안으로부터 진주로 몰려와서 목사 서예원과 더불어 진주성을 지킬 준비를 하다’-난중잡록(계사년 5월 24일)

일본의 10만 대군에 맞서 진주성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 진주성은 겨우 수천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1차 전투 당시 전사한 김시민 장군의 뒤를 이어 서예원이 진주목사 자리에 올랐다.

가장 먼저 진주성에 입성한 의병장 김천일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신은 금월 14일에 진주 성중에 도착하였습니다. 목사 서예원은 명군 대접차 나가 있다가 초저녁에 들어왔습니다. 15일 전라병사 선거이, 조방장 이계정,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장 고종후 등이 연이어 도착했습니다.

다음날 전라순찰사 권율이 전라병사에게 전령하여 모두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최경회, 황진 등과 함께 남은 군사를 규합하였으나 모두 3000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은 광활한데 군졸은 이와 같으니 방어하기 쉽지 않습니다. 대개 진주는 실로 전라의 보장인데 순찰사 이하 산음으로 옮겨갔으니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선조실록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창의사(倡義使)판결사(判決事) 김천일(金千鎰)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한 내용이다./자료제공=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급박해진 진주성, 분열과 갈등

이 대목에서 당시 전투를 앞둔 진주성의 전투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차 전투를 앞두고 진주목사 서예원은 그제야 성으로 복귀했고, 전라순찰사 권율이 전라병사 선거이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해 일단의 관군이 진주성을 빠져나갔다.

김천일과 최경회 등이 겨우 3000여 명의 병력을 수습했는데, 이 병력이 원래 진주성에 있던 관군까지 포함한 수치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병력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은 여러 정황상 추정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 보면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외부에서 성안으로 들어온 의병과 군사의 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김천일 300명, 황진 700명, 최경회 500명, 고종후 400명, 장윤 300명, 이잠 300명 등 2800명 정도이다.

여러 전문가들은 2차 전투 당시 진주성의 병력을 대략 6000~7000명 선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병력의 규모를 기록한 문헌이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진주성의 관군과 뒤에 입성한 김천일, 최경회 등의 부대까지 포함해도 1만 명을 넘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강동욱 진주문화사랑모임 상임이사는 “최경회와 황진의 군사는 관군이므로 실제 의병의 수는 1600여 명 정도 된다. 전투가 끝나고 경상우병사가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진주성 군사를 2004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료들을 살펴 볼 때 진주성의 관군과 의병의 수는 대략 6000~7000명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당시 진주성의 군사들은 김천일을 비롯한 호남의 의병, 충청도, 경상도의 관군과 의병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관군의 통일된 지휘를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이들을 지휘해야 할 권율과 선거이 등의 관군들은 왜 서둘러 진주성을 빠져나간 것일까.

◇진주성을 포기할 순 없다

단초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군이 시시각각 진주성으로 밀려오자, 조선군 수뇌부와 의병장들이 의령에 모여 계책을 논의했다.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한 전략적 회동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조선군에는 10만의 적군에 맞서 싸울 병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율과 이빈 등 조선군 수뇌부와 곽재우, 김천일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진주성 전투 참여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장수와 의병, 의병 서로 간에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난중잡록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순변사 이빈이 여러 장수와 의병을 모아 의논하기를, “흉적의 계획이 반드시 진주를 함락시키고 말 것이니, 먼저 들어간 군사로서는 지키기 어렵다. 의병을 더 보내면 기세를 더할 수 있으리라”하며 진주성 수성에 의병들의 동참을 요청했다.

이에 의병장 곽재우가 “지금 적병의 세력을 당해낼 수가 없는데, 3리 되는 외로운 성이 어찌 능히 지켜낸단 말이오. 하물며 모든 군사가 다 성중으로 들어가 버리면 또 안팎에 응원하는 세력이 없어지니 나는 마땅히 밖에 있어 응원이 되고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소”라며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에 경상우감사 김륵이 크게 노해 “장군이 대장의 영을 따르지 아니하니 군율은 어찌하겠소”라고 하니 곽재우도 “한 몸이 죽고 사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100번 싸운 군사를 어찌 잃는단 말이오. 나는 차라리 자결을 할 지언정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소”라며 재차 입성을 거부했다.

이빈이 그제야 곽재우로 하여금 정암진을 지키게 했다. 그렇게 조선군의 회동은 별 소득 없이 끝이 났다.

진주성 수성을 놓고 섣불리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파와 어렵지만 진주성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경파로 나뉜 까닭이다.

가장 강력하게 진주성 수성을 주장한 이는 호남 최초의 의병장 김천일이었다.

“제 아무리 적이 10만 대군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진주성에서 그러한 적이 두려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행주대첩 등에 참전한 김천일은 호남과 가까운 진주를 버린다면 호남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천일은 뜻을 같이 하는 의병들과 함께 14일 진주성에 입성했다. 많은 호남의병들이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동참했다.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전투의 대승은 목사 김시민의 철저한 대비와 민·관·군이 승리를 위해 힘을 합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또다시 전투를 앞둔 1593년 6월의 진주성은 달랐다. 결국 관군과 의병들은 의령에서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명군도 수수방관했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참여하지 않았던 1차 전투 때와는 달리 2차 전투 당시에는 거의 전 병력인 10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동원됐다”면서 “병력과 장비의 절대적인 열세, 일본의 철저한 준비도 진주성 수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적의 선봉이 16일 함안에 이르렀다. 이빈과 권율, 선거이 등이 이끄는 조선군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이 후퇴만 거듭하면서 오히려 적의 사기만 북돋워 주는 격이 됐다.

권율 장군과 이빈 등은 쫓기어 전라도 쪽으로 물러났고, 의병장 곽재우 등도 후퇴하고 말았다. 사실상 진주성 주변에 진주성을 구원해줄 관군과 의병세력들이 전무해진 상황이 됐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진주성 2차 전투는 1차 때와는 달리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었다. 명군도 방관했지만 무엇보다 조선군의 지휘부가 문제가 있었다. 만약 조선군과 의병들이 총동원돼 진주성 구원에 나섰더라면 명군도 어쩔 수 없이 개입했을 것이다. 진주성이 완전히 고립되게 만들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진주성 2차 전투를 앞두고 또 하나의 악재가 발생했다.

1차 전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학봉 김성일이 병사한 것이다. 당시 김성일은 경상우도 순찰사, 현장 최고 지휘관이었다. 1차 전투가 끝나고 진주대첩승첩인 진주수성습첩장을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현장의 최고 지휘관이 병사하면서 진주성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 졌다. 이런 가운데 일본군 10만의 대병력은 시시각각 창원과 함안을 지나 진주로 밀려오고 있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진주성의 영역 변천도. 자료제공=김준형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글 싣는 순서
총괄-다시 전운이 드리운 진주성
1편-일본의 협박, “진주성을 비워라”
2편-죽을지언정 진주성을 포기할 순 없다
3편-고립된 진주성, 시작된 10만 일본의 총공세
4편-치열한 공방전, 그들의 처절한 싸움
5편-기다리던 지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6편-고귀한 충절은 남강에 드리우고
7편-끝내 무너진 진주성
8편-대첩과 대패, 앞으로의 과제
9편-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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