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6)
[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6)
  • 임명진
  • 승인 2019.07.1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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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충절은 남강에 드리우고
명장을 잃은 진주성


‘흉적이 이달 22일에 진주성을 포위하고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분탕질을 하고 도로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진주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28일에 받은 운봉의 가관, 남간의 치보에 의하면, 산음현 수관리의 회답 문장에 ‘진주를 포위한 뒤에 적도가 사경에 가득히 널렸으므로 성중에서 적에게 대응하는 조처를 알 수가 없고, 또 함양 수성장의 회답에 ‘24일 왜적이 진주를 3겹으로 포위하고서 죽교·죽부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포를 쏘는 소리가 사방에 들렸고 남강 건너편에 무수한 진을 쳤으며, 단성 동쪽과 단계 등지에도 많은 왜적이 매복해 있으면서 분탕질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상이 전해들은 대략이고, 진주의 접전이 지금 7일이나 되었는데도 한 번도 분명한 보고를 듣지 못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선조실록



진주성은 일본군에 겹겹이 포위됐다. 주요 교통지마다 매복과 군사를 배치해 진주성 안팎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했다.

전라도순찰사 권율은 이 같은 진주성의 상황을 장계로 조정에 올렸다.



 
에도시대 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 에혼다이코기)’에서의 1593년 진주성 2차 전투도. 일본군이 운제(雲梯 구름사다리)를 사용해 진주성을 공격하고 있다./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연일 계속되는 악전고투

26일까지 벌어진 전투의 횟수만 족히 십 수 회가 되었다. 하지만 10만의 일본군도 진주성의 완강한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매일 공세를 벌였지만 번번이 패퇴를 당했다.

일본군은 27일 날이 밝자 마자 다시 총공세를 시작했다. 진주성의 동문과 서문 밖 5곳에 언덕을 축조하고 그 위에 대나무를 엮어 조망대를 만들었다. 여기에 조총수들이 올라가 성안을 내려다보고 탄환을 쏘아댔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일본군은 귀갑차를 고안하고, 동문과 서문 밖에 5개의 토산을 쌓고 누각을 만들어 성안을 굽어보며 총탄을 발사했다. 이 때문에 조선군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성의 다방면에서 공격을 시도했고, 성벽을 넘기 위해 여러 공성기계를 만들어 적극 활용했다”고 말했다.

조선군은 곧바로 대응에 나섰지만 비 오듯 쏟아지는 적의 총탄에 300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적들은 또 큰 궤짝으로 사륜거를 만들어 수십 명이 각각 철갑을 입고 궤를 옹위하고 나와서 철추로 성을 뚫으려 했다.

이때 김해부사 이종인의 활약이 컸다. 앞장서 적을 죽이니 나머지 적이 모두 도주했다.

성 안의 사람들도 성을 공격하는 일본의 사륜거에 기름을 부은 횃불을 계속 던지니 적들이 다 타 죽었다. 날이 다시 어두워지자 적들은 다시 신북문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이때에도 이종인은 그 수하와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워서 적을 물리쳤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매일같이 성의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에 진주성의 피해도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수많은 적들과 교전하는 동안 어느새 하루가 지났다.

28일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올 무렵, 다시 시작된 적의 공세에 성의 수비가 무너질 뻔 했다.

김해부사 이종인과 군사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힘을 다해 싸웠다. 혼전 중에 적장 하나가 탄환을 맞고 죽자 그제야 물러갔다. 이때 죽은 적이 매우 많았다.



◇순성장 황진의 전사

이날 진주성은 명장을 잃었다. 진주성의 군사와 백성들은 피투성이로 싸워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들을 일으켜 세운 것은 충청병사 황진과 김해부사 이종인, 장윤 등의 솔선수범하는 장수들의 역할이 컸다.

그런 황진이 적이 쏜 탄환에 전사했다. 충청병사 황진은 진주성 2차 전투 당시 현장 지휘관인 순성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그런 황진이 전사하자 온 성 안이 애석해 하며 여파가 컸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당시 충청병사로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전한 황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황진은 조선의 명재상 황희의 5대손으로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기개와 절개가 남달랐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을 때 적의 상황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살피고는 검 한 쌍을 사 가지고 돌아와 말하기를 “머지않아 적이 올 텐데 이 칼을 써야 하겠다”고 했다.

용인의 패전에서는 황진이 별부의 장수였는데 그의 부대만 군사를 온전하게 해서 돌아왔고 호치의 승첩에서는 공이 제일 컸다.

진주성에는 충청병사로 참전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충청병사로 진주성 수비와 직접 관계가 없으니 밖에서 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하자, ‘나는 이미 의병장 김천일과 약속을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다’고 했다.

솔선수범하고 옛날 명장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진주성 2차 전투 당시에는 외부에서의 지원이 전혀 없었기에 일본군이 1차 전투와 달리 배후 걱정 없이 진주성 공략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무려 열흘 동안 전투를 지속했던 것은 그만큼 황진을 비롯한 이종인, 장윤 등 성안의 장수들이 최일선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잘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외부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이 갈수록 진주성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조선조정은 여전히 진주성의 내부 상황을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진주가 포위된 지 오래여서 성 안의 사졸들이 도망해 나올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다. 성을 지키는 일은 할 수 있을 듯하지만, 성 안에 마초가 이미 다 떨어졌을 것이니 군마가 다 죽었을까 염려된다. 비봉산은 전에 곽재우가 진을 쳤던 곳인데 지금은 모두 적진이 되었다. 진주성이 포위된 지 10여 일이 되었는데 필시 성 안의 장사와 밖에 있는 장관이 서로 통신하는 일이 있었을 것인데도, 지금은 은밀히 통한 일을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선조실록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에도시대 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 에혼다이코기)’에서의 1593년 진주성 2차 전투도. 일본군이 귀갑차를 사용해 진주성 성벽을 무너뜨리고 있다./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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