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진주경제[7] 구자경의 기업가 정신(1)
일취월장 진주경제[7] 구자경의 기업가 정신(1)
  • 정희성
  • 승인 2019.07.2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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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앞세운 진취적 경영이념 정립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 경상대 기업가추진단 공동기획
 
 

흔히 창업 2세들의 경영수업은 영업이나 기획 분야, 해외지사에서 몇 년간 실무를 보다가 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경영자로 나가는 것이 익숙한 관행이다. 이에 반해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은 십 수 년 동안 공장생활을 했다.사람들이 부친인 구인회 회장에게 “장남인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구인회 회장은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그래서 상남은 누구보다도 현장을 잘 안다. 그리고 혁신의 답도 현장에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는 LG그룹의 지금 모습으로 바꾼 혁신의 전도사였다.

그는 1950년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에 입사한 이래 20여 년간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경영 역량을 바탕으로 기술과 인재를 중시했고, 필생의 업으로 여긴 경영혁신을 주도하며 자율경영을 정착시켰다. 더욱이 나름의 철학과 소신으로, 한창 원숙한 경지에 이른 70세에 은퇴를 선언하고 젊은 세대에게 경영을 물려준 ‘참 경영인’이었다.

구자경 회장의 은퇴 후 모습.
LG의 창업주인 고(故)구인회 회장의 호는 ‘연암(蓮庵)’으로 이는 연꽃이 핀 초막이란 뜻이다. 또 고 구본무 회장의 부친인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호는 ‘상남(上南)’이다. 상남은 구 명예회장의 고향인 진주에 추억이 깃든 장소의 이름을 딴 것으로 전해진다.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지수보통학교를 거쳐 부산사범대 부속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락희화학에 입사해 서울의 화장품연구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뒤이어 발발한 6·25 동란으로 인해 연구 업무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 채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후 상남은 주로 생산현장에서 직원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갔다.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새벽부터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

갑작스럽게 선친이 타계하자 2대 회장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남은 오랜 기간 현장에서 쌓은 역량과 자신감을 십분 발휘해 ‘과연 거대한 그룹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라는 주변의 우려를 무색하게 했다. 상남은 플라스틱 가공제품의 국내 최초 생산 현장은 물론,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라디오를 생산하는 과정도 직접 챙겼다. 이 땅에 화학공업과 전자사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몸소 겪은 것이다. LG의 어느 공장이든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공장에 따라서는 어느 상자에 어떤 공구가 들어 있고, 누가 어떤 작업을 잘 하는지도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상남은 창업 초기부터 회사운영에 합류해 부친인 구인회 회장을 도와 LG를 일궈온 1.5세대 경영인이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LG는 부산의 부전동공장, 연지공장, 동래공장, 초읍공장 등 생산시설을 연이어 확장하며 화장품, 플라스틱 가공 및 전자산업에서 국가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구자경 회장의 경영활동과 그룹성장의 모습을 담은 삽화.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 LG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구인회 회장의 뒤를 이어 1970년부터 1995년까지 만 25년 동안 LG의 2대 회장으로 재임한 상남은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의 매출은 260억 원에서 30조 원대로 성장했고, 사원수도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상남은 자기 자신이 LG역사에 혁신의 전도사로 남고 싶어 할 정도록 혁신에 전념했다. 정인철 진주경제발전추진 위원장이 기자 시절 그의 자서전을 자문 한 적이 있다. 상남이 자신의 자서전을 검토하면서 남긴 글에는 경영혁신추진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오직 이 길밖에 없다. 경영혁신을 시작하면서 혁신의 방향과 과정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임직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내가 주목했던 것은 ‘임원의 고령화’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물론 이 문제는 매년 인사팀의 보고를 통해 나름대로 고민해 온 것이지만, 임직원들의 우려가 생각보다 깊다는데 놀랐다.

당시 우리 그룹의 사장단 평균 연령은 50대 후반으로, 50대 초반으로 포진된 삼성그룹과 비교될 만큼 높았다. 이것은 전반적인 인사적체를 가져오게 됐고 직원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확보하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승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비관적 전망이 팽배했던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하면 뭘 해. 구씨, 허씨가 아니면 경영자가 될 수 없는데”, “나이 든 경영자를 바꾸지 않고는 회사가 역동적일 수 없다” 등의 지적까지 터져 나오게 됐다.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러한 인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나는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이러한 사내 의견에 수긍하고 어려운 결단을 하게 됐다. 이로 인해 당시 나이가 많은 사장들과 인척들이 회사를 떠났다. 이것은 회사가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탄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나의 이 같은 적극적인 행동은 회장이 변하지 않고는 임직원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인식에서였다. 경영혁신을 하기 전 만해도 사장은 정년이 없었다. 사장의 정년을 지금의 예순으로 정한 것은 경영혁신을 시작한 지 2년 후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 해, 구·허가(具·許家)의 처가 쪽 친척은 모두 물러났으며, 특히 나이가 든 사장과 부사장은 능력과 상관없이 우수한 후배들을 위해 서둘러 퇴진했다. 기득권의 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을 인지한 본인들이 결단을 내림으로써 우리의 혁신 노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체로 예순 다섯이 조직 활동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도 예순 셋이 지나면서 사고나 판단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장의 임기를 예순 셋으로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경영자의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자질이 우수하고 연부역강(年富力强)한 후계자가 많이 육성될 수 있게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것 역시 경영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룹 차원에서 경영혁신을 전 방위적으로 전개하기는 재계 전체에서도 우리가 처음일 것이다. 일부 그룹에서 부분적인 혁신 노력을 기울인 적은 있지만 우리처럼 미래에 대한 사활을 혁신에 둔 경우는 우리가 최초였다. 마침내 1988년 11월 22일 나는 사장단회의를 통해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을 발표했다. 그룹의 사업전개 방향에서부터 이를 성공시킬 조건들을 모두 망라한 실질적 지침이자 비전이었다.

20년이 넘은 최고경영자 생활을 통해 이날을 잊을 수 없는 가장 뜻 깊은 날이었다. 나는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 훗날 이를 회고하는 후배들로부터, ‘그 때 우리 그룹에서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회장’이라고 회자되기를 소원했다. LG의 동료와 후배들이 나를 떠올릴 때 혁신을 업적으로 기억되는 ‘상남 회장’이기를 염원할 만큼 당시 내겐 혁신이 생활의 전부였다. 원래 한 가지 일에 빠지면 뿌리를 뽑아야 성이 풀리는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 때의 혁신은 절대적이었고, 그룹의 미래를 담보하는 유일한 대안이라 믿었던 것이다. 늘 말해 왔지만 혁신의 여정에는 종착역이 없다. 한도 끝도 없는 것이 혁신이다. 나는 혁신의 여정이 힘들고 고단한 길임을 알고 있었기에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시작과 함께 승부수를 던졌다.

“예순 아홉까지 경영혁신을 궤도에 올리고 물러난다” 이것이 내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자 다짐이었다. 나는 이 같은 혁신 노력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마라톤을 하는 심정으로 뛸 것임을 다짐했다. 나의 모든 스케줄도 경영혁신을 최우선으로 하여 짜도록 지시했다.

이때부터 남용(南鏞·현 LG텔레콤 사장) 이사를 혁신 비서로 대동하고 모든 시간과 노력을 오직 이 하나의 주제를 위해 투여하기 시작했다. 내 스스로를 ‘혁신의 전도사’로 자임하고 모든 열정을 혁신에 걸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때를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렇게 긴 구간을 잠시도 쉬지 않고 뛰었는지 신기하기만 할 정도다.

또 1990년은 내게 있어 원대한 ‘희망과 약속’을 함께 다졌던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연초에는 기획조정실을 회장실로 변경했고 2월 20일에는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을 대외에 선포하는 한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을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선포했다. 이 같이 경영이념을 새롭게 구축하게 된 것은 1988년 이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일구어 온 경영혁신의 핵심 구상과도 맥이 닿아 있다. 시대적으로도 80년대 이후 우리의 경영여건이 크게 바뀌었던 데다가, 국경 없는 무한 경쟁이 예고되는 90년대의 시대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는 새로운 경영이념의 뒷받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경영이념을 개정하기까지 나에게 적지 않은 고뇌를 가져다 준 것은 선친의 창업정신이자 우리 그룹의 정신적 지주였던 ‘인화단결, 연구개발, 개척정신’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이 이념은 현대의 경영환경에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가치였다. 그렇지만 시대의 변화로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오해의 여지가 생긴데다가 그룹의 새 비전을 실현해가려면 임직원의 가치관도 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경영이념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사실 ‘인화’라는 개념은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고의적인 잘못을 ‘정(情)’으로 감싸는 어정쩡한 가족주의나 온정주의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사전에 충분한 합의를 거쳐 합리적 원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 원칙들은 인화를 지키기 위해 이윤이 보장된 사업도 포기할 줄 아는 엄격한 기준이자 의사결정 시스템이며, 바로 인화의 기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화에는 상호 합의한 원칙을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하는 엄정한 책임의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유의 정신이 회사 규모가 커질수록 퇴색되고, 운영에 소홀한 채 구호에 그쳐버리게 된 것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 경영자들의 실책이었다. 그 결과로 인화란 무사안일과 비합리를 덮어주는 거대한 덮개의 구실을 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조직 내에 ‘인화’를 빙자해 뿌리깊게 퍼져있는 무사안일과 비합리의 풍토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선친의 창업정신을 더욱 발전시킨 새로운 경영이념을 제정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새롭게 제정되는 경영이념은 먼저 전 임직원이 알기 쉽고 지킬 수 있는 보편성이 있으면서도 다양한 사업문화에 다 잘 어울리는 내용이어야 했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면서도 21세기에 이르는 장래의 발전성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세 번째로는 최고 경영자의 의지나 발상에 일치하면서도 이를 어떻게 개개인의 판단과 행동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 등이 보완해야 할 과제였다.

나는 이것을 다시 그룹 정책위원회에서 논의하도록 하여 몇 가지 바람직한 가치관을 정리했는데, 먼저 고려된 점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룹의 사업 전개 방향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종결정은 사장단회의에서 확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회의는 벽두부터 난항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경영 이념을 재정립하는 이유와 의미에 대해 나와 일부 사장들 사이에서 발생된 의견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사장들의 의견 중에는 ‘인류의 보다 풍요로운 생활 창조’, ‘국가에 대한 공헌’ 등과 같은 거창한 의미를 담자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참으로 뜻은 좋았지만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라, 엄연히 영리를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그러므로 사업의 기반인 고객에게 그들이 원하는 가치를 창조하고 제공하며, 이를 위해 기업 운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존재 의의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써 자연스럽게 국가와 인류에 대한 공헌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확고한 내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 선언적 의미의 경영 이념은 경영 활동에 실질적 지침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무려 4시간 여에 걸친 토론이 계속되었지만 계속 원점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렇다고 회장인 내가 경영이념에 대한 최종결정을 누구에게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고, 하염없이 논의의 결과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내가 직접 사장들을 설득해 논의의 범위를 그룹의 사업 전개 방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치관으로 좁혀 가면서 어렵게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종전의 개척정신, 연구개발 이념을 진일보시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라는 개념을 도출했고, 인화단결의 정신을 이어받아 ‘인간존중의 경영’을 그룹의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제정했다.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는 모든 사업의 전략구상이 고객을 위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객이라면 흔히 상품이나 서비스를 수용하는 소비자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개념을 넓혀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고객이 되는 것이다. 영업부 직원에게는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직접적인 고객이겠지만, 관리부서 직원에게는 영업부나 생산부가 그들의 고객이 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경영이념은 항상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객으로부터 배운다는 생각, 고객과 더불어 발전한다는 사고와 인식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소비자에게 ‘고객’이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우리 그룹이 아닌가 싶다. 또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라는 경영이념을 철저히 생활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듬해부터 ‘고객의 달’ 행사를 마련해 실시했다. 매년 4월을 고객의 달로 선포하고 한 달 동안 각 사마다 다양한 고객의 달 행사를 가짐으로써,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객으로부터 배운다는 우리의 의지를 대내 외에 심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에는 회장인 나도 주유소에 나가 직접 주유기를 잡았고, 고객의 소리를 현장에서 직접 듣기 위해 LG전자서비스센터를 자주 방문했다. 그곳에서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고객의 불만을 들으면서 앞으로의 경쟁은 기술경쟁 못지않게 서비스경쟁이 경영의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존중의 경영’은 사람, 자본, 기술, 설비 등 기업 활동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 가운데에서 ‘사람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한사람을 보다 우수한 인재로 육성한다는 것을 경영의 실천철학으로 삼자는 의미였다. 우리 그룹이 경영체제를 각 사 사장을 정점으로 한 ‘자율경영’으로 삼은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新) 경영이념이 선포된 후 우리 사업장을 찾는 일본 기업인들로부터 LG의 경영이념이 인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이 지향하는 바가 좋다는 데는 기분이 나쁠 리 없지만 그때마다 액자 속 선언이 아닌 LG의 경영문화로 실현돼야 할 사상과 철학임을 다짐하게 된다

정리=정희성기자

‘일-취-월-장 진주경제’ 프로젝트는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인철), 경상대학교 기업가정신추진단(단장 정대율 교수)이 공동으로 진주지역 출신 기업가들의 혁신적인 기업가정신 뿌리를 탐색하고 정립해서 위기의 한국경제-진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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