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길[3] 서울시대(2)스스로 벼슬에 나아갈 뜻을 접다
남명의 길[3] 서울시대(2)스스로 벼슬에 나아갈 뜻을 접다
  • 임명진
  • 승인 2019.10.2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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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대전을 읽고 돌아서 마음…유학의 길 매진
‘한밤중의 공부는 요긴한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들은 잠을 많이 자서는 안 된다. 공부는 경(敬)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래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서 항상 정신은 깨어있어야 하고, 또 몸과 마음을 늘 단속해야 한다.’-남명별집 언행총록

조선시대 양반들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가문의 영예라고 생각했다. 선생도 어려서부터 다른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선생은 한번 자리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 종일 글만 읽었기에 그가 머물던 산사의 스님은 “방이 하도 조용해 밤이 깊어 때로 마음에 드는 글귀를 보고서는 손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고서 아직도 글을 읽고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생은 시와 문장, 글씨에도 남다른 조예가 깊었다. 선생의 문집인 ‘남명집’에는 선생의 한시와 문장 등이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가 사람의 마음을 허황되게 만든다고 여겨 20대 중반 이후에는 시 짓기를 스스로 자제했고 제자들에게도 이를 당부했다.

그래서 선생의 시는 풍류와 경치를 다룬 것이 아닌 대부분 올바른 세상을 향한 의지와 굳센 각오가 담겨 있다.

문장으로는 특히 좌구명과 유종원의 옛 고문을 좋아했다. 좌구명은 중국 춘추시대의 노나라 학자이며, 유종원은 당나라 학자로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남명집에 수록된 선생의 문장을 보면 현란한 수사를 사용하지 않고, 내용이 심오해 여느 학자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그 느낌이 다르다”면서 “당시 글귀의 해석과 이론을 중시 여겼지만 선생은 여러모로 달랐다”고 말했다.

선생 본인도 말년에 당대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뤘던 퇴계 선생과 자신의 문장을 비교한 적이 있다.

‘퇴계의 문장은 지금 세상에서 쓰이는 문장이지만 성취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비단을 짜려다가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니 세상에 쓰이기에 곤란하고 퇴계는 명주를 짜서 한 필을 이루었으니 세상에 쓰일 만하다.’-남명별집 언행총록


◇큰 깨달음을 얻다

‘이윤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자의 학문을 학문으로 삼아, 벼슬에 나가서는 경륜을 펴서 업적을 이루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 아무 하는 일도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선생은 나이 25세가 되던 해, ‘성리대전’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성리대전은 중국의 송과 원나라의 학자들이 성리학에 관해 저술한 내용을 집대성한 서적이다. 선생은 그 중 원나라의 학자, 노재 허형의 글을 읽고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이윤’은 중국의 은나라 시절 탕 임금의 부름에 응해 나라의 기반을 탄탄히 한 인물이다. ‘안자’는 공자의 제자로 가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학문을 닦았다.

이 글을 읽은 선생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훗날 선생은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부한 바가 잘못되었음을 탄식했다. 이때 깨우치지 않았더라면 거의 일생을 헛되게 살 뻔했다. 갈 곳 없는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 얼굴을 만나 그런 심경이 되어 나도 모르게 손발이 춤을 췄다.’


그의 사후 제자 김우옹은 1572년 2월 기록한 행장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생이 25세에 벗들과 함께 산사에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성리대전을 읽으면서 노재 허형의 글귀를 보고 척연히 각성하고 망연히 자실하여 비로소 종전의 취향이 그릇됨을 깨달았다. 이에 고인이 이른바 위기의 학문이라는 것은 대개 이와 같다고 하고 탄식하며 밤새도록 자리에 들지 않더니 새벽에 벗들에게 읍하고는 돌아왔다. 이로부터 실학에 뜻을 돈독히 하여 각고면려하더니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밤을 새운 지 수년이었다. 이미 경전을 널리 섭렵하고 백가를 두루 달통한 연후에는 번잡한 것을 수렴하여 간략히 하고 일신을 반성하여 요체를 터득했으니 스스로 일가의 학문을 이룩하였다. 가정 정유년(1537년) 선생의 나이 37세에 비로소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유학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이때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을 사실상 마음속으로 접게 된다. 대신 공자와 주자, 주염계, 정명도의 초상화를 그려 사방에 병풍으로 만들어 펴 두고는 아침마다 인사를 했다고 한다.

마치 스승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심정으로 그들의 학문을 제대로 배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따로 스승을 둔 적이 없는 남명이기에 그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경험은 선생이 진정한 유학자로서의 길을 걷는데 큰 바탕이 됐다. 선생은 특히 스스로 체득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겼다.

이상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소장은 “어려서 백성의 곤궁한 삶을 목격한 선생은 실천적 학문을 좋아했는데 그것이 유학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선생의 실천유학이 후대의 실학자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줬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장의 해석이나 이론에 심취하지 않고 유학의 참모습에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허권수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본래 유학은 경세치용 등 실천 위주의 학문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다소 잘못 알려져 있는데, 선생은 유학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부친의 별세

선생의 나이 26세 때 부친 조언형이 세상을 떠났다. 조언형은 선생에 대한 기대가 컸다. 선생도 부친을 대단히 존경하며 따랐다.

조언형은 언론과 감찰 기능을 하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당시 조정은 기묘사화 이후로 권력투쟁이 극심했다. 신료들도 권력가에 아첨하며 줄을 서는 경향이 만연했다.

꼿꼿한 선비로 알려진 조언형은 권력가의 눈 밖에 나 외지를 떠돌았다. 그가 단천군수로 재직하던 당시 벗이 관찰사로 부임해 순시를 나오자 권력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인 그를 질타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선생의 강직한 기상은 그러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바가 컸다.

조언형은 험지로 알려진 제주도로 좌천되지만 마침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기에 부득이 사양했다.

하지만 권력가들은 병을 핑계로 험지 부임을 꺼려한다며 벼슬을 삭탈해 버렸다. 이에 충격을 받은 조언형은 병이 더욱 깊어져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선생은 부친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했다. 조언형은 벼슬은 했지만 청빈한 성품에 가세는 늘 풍족하지 못했다. 간신히 장례를 마친 선생은 곧바로 중종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바로잡아 줄 것을 청했다.

효심 가득한 선생의 청을 받아들여 중종은 승문원 판교의 관직을 다시 회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치에 환멸을 느낀 선생은 벼슬에 대한 회의감이 더 깊어지게 된다.

선생은 부친의 3년상을 지내고 고향 인근에 있는 의령 자굴산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부친을 잃고 가세가 어려워져 더 이상 학업에만 몰두하기 힘들었다.

당시 대부분 양반가문들이 경작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였지만 선생의 집안은 모친의 봉양까지 걱정할 정도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이때 선생의 처가 자신의 친정이 있는 김해로 갈 것을 권했다. 선생은 나이 22세 때 남평조씨 가문의 딸과 혼인했다.

처가는 김해의 지주로 가세가 풍족했다. 장남인 선생은 고심 끝에 모친 봉양을 위해 김해에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처가는 김해 신어산 아래 있는 탄동으로 선생이 마음껏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조식(曹植)은 방정(方正)하고 염결(廉潔)한 사람으로 형제와 같이 살면서 자기의 재물을 사축하지 않았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고 과거(科擧)는 일삼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3년 동안 최질을 벗지 않았으며, 집에 곡식 한 섬 없어도 항상 태연하였다’-조선왕조실록 명종 7년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사성현 유상 병풍

남명 선생은 공자, 주렴계, 정명도, 주자 등 네 성현의 흉상을 손수 그려서 높이가 60㎝가 채 안 되는 자그만한 네 폭의 병풍으로 만들어 놓고 때때로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이 참배하였다고 한다.

이 병풍은 선생의 후손인 고 조원섭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남명기념관에 기증했다. 덕천서원이 헐어지고 난 후 산천재에서 이 화병을 모시고서 차례를 드렸는데, 이때 남명 선생의 위패를 동편에 모시고 함께 향사를 드렸다. 지난 2016년 현재 이 화병은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최대한 원형을 복원한 것이다.

/사진 제공=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

 
사성현 유상 병풍 자료제공=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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