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9] 반 고흐의 발자취를 찾아서(7)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9] 반 고흐의 발자취를 찾아서(7)
  • 경남일보
  • 승인 2019.11.0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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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쉬르 우아즈
 
고작 십 년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스물일곱 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붓을 들고 내려놓기까지의 이 시간은 한없이 짧기만 하다.

게다가 고흐 자신이 흡족해 할 만한 작품다운 그림은 화가의 길로 들어선 지 5년이 지나서야 그릴 수 있었으니, 운명의 신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고흐에게 만큼은 너무나 가혹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짧은 삶마저도 정신병과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고, 사람들에게 외면 받기 십상 있었으며 끈질긴 외로움을 그림으로 달랠 수밖에 없던 이 남자는 결국 세상이 그에게 보내는 사랑과 따스함을 느끼지 못한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갖은 고통과 고독함 속에서도 고흐는 약 800여점이 넘는 유화를 남겼고, 그가 만약 더욱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더라면 오늘날 남겨 진 그의 작품 수가 얼마나 되었을지는 우리의 상상에 맡겨야 할 것 같다. 고흐가 남겨놓고 간 그림에는 그 어떤 화가와도 견줄 수 없는 고흐만의 특별함이 솔직하면서도 강렬하게 담겨있다. 그는 마치 얼마 되지 않을 자신의 인생을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반 고흐 영원히 이곳에 잠들다

평생을 방랑자처럼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던 고흐였지만 그에게도 오베르 쉬르 우아즈(이하 오베르)라는 마지막 정착지가 있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던 고흐가 어쩌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찾아온 마을이었을 것이기에 이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고흐의 흔적을 찾는다는 설레임보다 마음 한구석 애잔함이 같이 따른다. 파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오베르역에 도착하자 고흐의 마지막 여생을 따라 가 보기 위해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는 마을을 혼자 찾는 한국인 방문객을 위해 한국어로 번역 된 지도를 제공한다. 지도는 꽤나 유용해서 스마트폰 없이도 마을 구석구석에 묻어있는 고흐의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실제로 마을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마을 주민보다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하루 종일 머물러도 만나보기 힘들 숫자의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고흐에 대한 한국인들의 남다른 사랑을 느껴볼 수 있었던 동시에 사람들의 관심은 그의 작품보다는 인간 고흐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에 더욱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흐가 오베르에 온 이 유는 동생 테오의 제안 때문이었다.

생 레미 정신 병원에서 일 년여를 보낸 고흐는 다시 북부 프랑스로 가고 싶어 했고, 테오는 형의 병을 치료 해줄 수 있다고 여긴 가쉐 박사의 거처가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고흐에게 권유 했다. 오베르의 평온함과 자연이 어우러진 멋은 이미 예전부터 도비니, 세잔 등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베르에서 머물 숙소를 찾은 고흐는 가쉐 박사의 관심 속에서 매우 만족스러운 나날들을 보냈다. 가쉐 박사는 고흐에게 필요한 치료법은 더욱 더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여기고 고흐가 더욱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다. 그 덕분인지 고흐는 오베르에서 그의 화가 인생 중 가장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고흐가 이 마을에 머물렀던 날은 70여일에 불과 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80여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다. 하루에 한 작품 이상을 구상하고 완성한 셈이다. 오늘날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의 상당수가 고흐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고흐가 걸었던 길부터 잠들어 있는 곳 까지

1890년 고흐가 오베르에 첫 발을 내딛었던 기차역을 시작으로 아마 오베르의 모든 곳에 고흐의 발길과 시선이 닿았을 것이다. 특히 고흐가 두 달여간 머물렀던 여인숙, 스스로 총을 겨누었던 곳으로 추측되는 밀밭, 가장 사랑했던 동생이자 평생 지원군이었던 테오를 곁에 한 채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고흐의 방, 그리고 그가 영원히 잠들어 있는 무덤은 오늘날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꾸준히 이끈다.

마을 공동묘지에는 고흐의 이름이 적힌 묘비를 발견 한 후 느껴지는 측은함과 애잔한 마음 때문인지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외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은 잠깐이지만 고흐와 마주하며 그에게 위로와 진심어린 애정을 보내는 시간 일테다. 고흐의 무덤 옆에는 고흐가 눈감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동생 테오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6개월 뒤 형을 뒤따라 가버린 테오는 부인 요한나에 의해 형의 옆으로 옮겨졌다. 누군가가 형제의 묘 앞에 놓고 간 해바라기는 묘지 위의 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한없이 마음 시린 노란빛을 내뿜고 있었다.


◇정말로 자살일까

고흐의 죽음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서 자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의 의견도 상당 수 있다.

물론 그는 화가로 활동하는 동안 그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혼자서는 캔버스 한 장 살 수 없어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고흐였다. 그러나 그가 자살 한 1890년에는 그의 그림이 가치를 인정받는 기로에 들어섰다. 그가 한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의 평 이 신문기사에 실리기도 했고, 한 점의 그림이 공식적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이 조금씩 빛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생을 포기 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다. 정신병과 우울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슬픔과 우울함, 절망감을 그림으로 승화시켜 버릴 수 있었던 고흐였기에 극단적 선택을 했을리 만무 하다는 의견에는 고흐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더 짙게 깔려 있기도 하다. 또한 실제로 유서가 발견 되지 않은 점, 총상의 위치가 스스로 자살시도를 했다고 보기 어려운 곳에 위치하는 점, 스스로에게 겨눈 총이 사건 직후 발견 되지 않은 점 등이 그의 죽음에 의문을 더했다.

그러나 고흐는 총상을 입은 후 여인숙으로 돌아와 스스로 총을 쐈음을 고백했다. 혹여나 그 일이 갑작스런 발작 증세의 영향이었거나 누군가가 그를 쏘았다고 하더라도 운명의 신은 서른일곱의 고흐에게 그의 곁에 머물 것을 허락했다. 오늘날 고흐가 받고 있는 사랑과 관심을 그가 살아생전에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조금 더 살아보기로 결심했을까. 짧고 강렬했던 그의 인생을 위로하며 진한 애정을 보내는 오늘날의 우리가 있기에 더욱 행복해 할 고흐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분명하고도 강한 힘이 있다. 꼭 그의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를 곁들여야만 느낄 수 있는 가슴 뭉클한 감정 말고도, 고흐의 그림은 우리네 인생이 생각만치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라도 하듯 한없이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것 같다. 전 세계 그 어디서든 고흐의 그림 앞에 서게 된다면, 이제는 더욱 더 그림 앞에서 쉽사리 발길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의 마음을 읽어내야 하는 그 어떤 임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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