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6)한국 등반사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6)한국 등반사
  • 경남일보
  • 승인 2020.02.0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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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암 대장은 다울라기리2봉 원정 후 국내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했다. 사진출처=박철암기념관001
박철암 대장은 다울라기리2봉 원정 후 국내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했다. 사진출처=박철암기념관001

 

히말라야 선구자 박철암
한국 히말라야 등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지난 2016년 타계한 박철암 교수(1918~2016·경희대 명예교수)다. 그는 평안북도 영원군 소백면에서 태어나 16살 때 동백산(2096m)을 올라 산과 인연을 맺었다. 고 박철암 교수는 1962년 한국의 첫 히말라야 첫 정찰 등반, 한국인 최초 8000m 돌파, 1977년 고상돈 대원이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을 이뤄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1949년 경희대학교산악회를 만들고 활발한 등산 활동을 펼쳤다. 1956년 일본의 마나슬루 세계 초등은 그를 히말라야에 관심을 갖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8000m 산 가운데 미등으로 남아 있던 다울라기리(8167m)를 등반하기로 했다. 그러나 1960년 5월 13일 스위스가 초등하면서 다울라기리2봉(7751m)으로 대상 산을 변경했다.

1962년 첫 정찰 등반 다울라기리2봉


박철암은 1962년 8월 15일 한국 최초로 정찰 등반을 나섰다. 원정대는 일본에서 식량과 장비를 구입하고 태국~인도를 거쳐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9월 12일 베이스캠프(4600m)를 설치한 원정대는 10월 2일 정찰을 시작했다. 마얀디 빙하에 1캠프(5100m)를 건설하고 차례로 2캠프(5950m), 3캠프(6300m)를 만들며 만년설에서 첫 등반을 시작했다. 10월 11일 오후 3시 6700m 무명봉을 등정하고 고도를 높여 갔다. 그러나 해외 등반 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들에게 거대한 크레바스와 빙벽들은 넘어설 기술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발길을 돌렸다. 박철암 대장과 대원들은 다울라기리 산군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정보, 지도도 없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일본에서 얻은 다울라기리 산군을 손으로 그린 개념도가 전부였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시작은 위대한 도전으로 돌아왔다. 박철암 대장은 한국 최초 탐사 보고서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군(山群)의 탐사기(探査記)’를 발간(청구출판사)했다.

그는 ‘박철암의 산과 탐험’, ‘티베트 무인구 대탐험’, ‘지도의 공백지도를 가다’, ‘세계의 지붕 티베트’, ‘비경’ 등 히말라야와 티베트 관련 책들을 많이 출판했다.
1970년 한국산악회는 추렌히말(7371m) 원정에 나섰다. 김정섭을 대장으로 김호섭, 전병구, 한이석, 김기섭 대원 등이 참여했다. 원정대는 4월 16일 1캠프(4700m), 19일 2캠프(5230m), 22일 3캠프(5650m), 25일 4캠프(5980m), 26일 5캠프(6400m)를 설치했다. 4월 28일 오전 5시 30분 김호섭 대원과 셰르파 린지 왕겔이 5캠프를 출발했다. 이들은 오후 4시 30분쯤 추렌히말 동봉(7371m) 정상을 밟았고, 곧바로 이어 서봉(7541m)으로 전진했지만 7100m 지점에서 돌아섰다. 원정대는 처음으로 7000m를 넘어서는 성과를 올렸다.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최수남, 1971년 한국 최초 8000m 돌파


박철암은 1971년 로체샤르(8400m) 원정에서는 최수남 대원이 한국인 처음으로 8000m를 돌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는 로체샤르 등반 후 귀국하면서 네팔 관광성에 6년 후에 있을 1977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 입산 신청서를 접수했다. 그의 노력은 1977년 고상돈 대원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한국이 세계에서 8번째로 세계의 지붕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혼의 산 마나슬루…첫 희생자·15명 사망 비극


1971년 김정섭 대장은 세계 8위봉 마나슬루(8163m)에 도전장을 던졌다. 5월 6일 김호섭 대장은 친동생 김기섭 대원과 7600m에 5캠프를 설치했다. 오후 5시쯤 한차례 강력한 돌풍이 텐트를 덮쳤다. 김기섭 대원은 밖에 텐트를 잡으려고 일어서는 순간 돌풍 중심부에 휘말렸다. 김기섭 크레바스에 빠져 숨지고 말았다. 한국 최초의 원정대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1972년 2차 원정대는 故 김기섭 대원 형인 김정섭(총대장)과 김호섭(등반대장)과 동생 김예섭도 대원으로 선발돼 4형제가 모두 참여했다.
1972년 4월 9일 원정대는 3캠프(6500m)에 머물며 다음 날 4캠프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많은 눈이 내렸고 4월 11일 새벽 3시쯤 대형 눈사태를 일으켰다. 눈사태는 3캠프를 휩쓸고 지나갔다. 대원과 셰르파 18명 중 생존자는 김예섭과 셰르파 2명 등 3명이 전부였고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7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고상돈 대원
1977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고상돈 대원

 

고상돈, 1977년 세계의 지붕에 오르다


1977년 대한산악연맹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했다. 김영도 총대장(53)을 비롯해 이윤선(36), 장문삼(35), 김명수(33), 박상렬(33), 곽수웅(33), 김영한(30), 고상돈(29), 한정수(29), 이상윤(29), 김병준(28), 이기용(28), 이원영(27), 도창호(26), 전명찬(25) 대원 15명이 선발됐다. 7월 19일 네팔 카트만두를 출발한 원정대는 8월 9일 해발 54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8월 16일 1캠프(6100m), 19일 2캠프(6450m), 26일 3캠프(7400m)를 차례로 건설했다.
김영대 총대장은 1차 정상 공격조로 박상열과 셰르파 사다 앙 푸르바를 선택했다. 공격조는 9월 7일 4캠프(8000m), 8일 5캠프(8510m)에 진출한 후 9월 9일 정상 공격을 감행해 8750m까지 진출했다. 정상을 약 100m 남겨두고 산소가 떨어졌고 셰르파 상태가 나빠지면서 등정을 포기했다. 그들은 ‘죽음의 지대’인 8700m에서 비박을 감행하며 베이스캠프까지 무사히 귀환했다.
2차 등정조에 속했던 고상돈 대원이 9월 14일 4캠프로 진출하고 5캠프에 머물렀다. 고상돈과 셰르파 펨바 노르부는 9월 15일 새벽 4시 5캠프를 떠나 낮 12시 50분 정상에 우뚝 섰다. 고상돈은 베이스캠프에 등정 소식을 알렸다. “여기는 정상! 더이상 오를 곳이 없다.”
고상돈의 등정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8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 국가가, 고상돈은 58번째 등정자로 기록됐다.

8000m 14좌 등정이 시작되다


1980년대 들어 히말라야 원정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늦게 시작했지만 에베레스트 등정을 계기로 8000m 자이언트급 거봉을 하나씩 등정하기 시작했다.<한국 히말라야 등반사(1962~2019)표 참조>

1980년 4월 28일 동국대산악회(대장 이인정) 서동환 대원이 마나슬루를 등정하면서 한국 산악인들의 숙원을 풀었다. 특히 동국대는 단일 산악회로는 최초로 8000m를 오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부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2년 한국산악회는 마칼루원정대(대장 함탁영)를 파견했고 5월 10일 허영호는 마칼루(8463m) 정상에 섰다. 허영호 대장은 최악의 기상 조건으로 사진 촬영을 못했다. 그는 대신 예지 쿠쿠츠카가 1981년 단독으로 올라 정상에 두고 온 아들 장난감을 갖고 내려와 등정 의혹을 모두 해소했다.


1986년 대한산악연맹은 아시안게임을 기념하기 위해 K2(8611m) 원정대를 파견해 장봉완, 김창선, 장병호가 등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K2 등반을 위해 원정대는 4년이 넘는 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지며 8월 3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정상에 섰다. 1986년 K2에서는 세계 각국 원정대와 포터 등 18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8년 부산합동대는 다울라기리원정대(원정대장 조정술)를 파견해 11월 14일 북동릉 루트를 통해 최태식 대원이 한국 초등을 이뤄냈다. 대한산악연맹은 88서울올릭핌을 기념해 에베레스트·로체원정대(원정대장 최창민)를 파견했다. 에베레스트에 김창선·엄홍길·장봉완·정승권·장병호 대원이 등정했다. 로체는 정호진·임형칠·박쾌돈·박희동 대원이 10월 2일 오전 9시 로체 정상에 섰다. 에베레스트·로체원정대는 10명이 등정에 성공하는 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뒀다. 이 등반을 계기로 1990년대 한국 산악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특히 원정대원 선발 과정에서 서울은 물론 전북(전재범, 이의재)과 강원(이의현), 충북(송열헌, 신영호), 경남(엄홍길, 박쾌돈), 대구(장병호), 전남(임형칠) 지역 산악인들을 균형 있게 선발하면서 1990년과 2000년 지역 산악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90년 대전충남연맹은 가셔브롬1봉(8065m) 원정대(원정대장 윤건중)를 파견, 7월 16일 박혁상 대원이 한국 초등했다. 1991년 성균관대산악회(대장 한상국)는 가셔브롬2봉(8035m) 등반에 나서 7월 18일 한상국·김창선·김수홍·유석재가 등정해 한국 초등을 이뤄냈다. 경남연맹 울산지부도 원정대(대장 송정두)를 파견해 7월 20일 이용순·한영준·장상기·조재철·박을규 대원이 정상에 섰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등정하는 기록을 남겼다.


22년 만에 한국 14좌 모두 올라


1992년 6월 29일 경남산악연맹은 낭가파르바트(8125m)에 원정대(원정대장 조형규)를 파견해 박희택·송재득 대원이 정상에 섰으며 함께 참여한 광주우암산악회 김주현 대원도 등정에 성공했다. 1992년 9월 20일 경남연맹 울산지부·서울합동대(원정대장 김관준)가 초오유(8201m) 원정에 나서 남선우·김영태가 등정했으며 1995년 7월 12일 한국스페인합동대 엄홍길과 광주전남연맹 원정대(원정대장 위계룡) 박신영·이정현·박현재가 브로드피크(8047m)를 각각 올랐다.
1999년 5월 12일 동국대산악회(원정대장 박영석) 박영석이 캉첸중가(8586m) 등정에 성공하면서 한국은 22년 만에 8000m 14개 봉우리를 모두 올랐다.
2000년 들어 한국 산악계는 엄홍길·박영석은 8000m 14좌 완등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박영석은 2001년 등정 의혹이 있었던 로체를 오르면서 한국 최초 완등자로 기록됐다. 2002년 한국도로공사 산악팀은 시샤팡마 남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해 한국 최초로 8000m급 거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성과를 올렸다.

유명 산악인들 산에서 잠들다


그러나 한국은 많은 산악인들을 잃었다. 대표적인 여성 산악인 지현옥이 1999년 안나푸르나 등정 후 하산하다 실종됐다. 2007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을 35년 만에 재등한 이현조 대원과 제주 출신 유명 산악인 오희준 대원이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눈사태로 사망했다. 2008년 K2 등정 후 하산하다 8300m 지점에서 눈사태로 황동진·김효경·박경효가 숨졌다. 2009년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하산하다 고미영이 추락사했다. 당시 그녀는 8000m 11개 산을 올라 14좌 완등을 눈앞에 뒀지만 도전은 멈추고 말았다.

2010년 마나슬루 정상을 앞두고 하산하던 윤치원·박행수 대원은 악천후를 만나 2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1년에는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박영석·강기석·신동민이 실종되면서 산악계와 국민들을 충격에 빠졌으며 난이도 높은 등반을 추구하던 김형일·장지명은 촐라체 북벽을 등반하다 추락사했다. 2013년 김창호는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올라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8000m 14개산을 무산소로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4캠프에서 12개 봉우리를 함께 오른 서성호 대원을 잃는 비운을 맛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 김창호가 2018년 구르자히말(7193m) 등반 도중 사망했다. 10월 11일 강한 바람에 의한 사고로 한국인 5명과 네팔인 4명 등 9명이 숨져 1972년 15명의 목숨을 잃은 마나슬루 대참사가 재연되기도 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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