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작은 꽃밭 가꾸기
[경일춘추]작은 꽃밭 가꾸기
  • 경남일보
  • 승인 2020.03.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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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흙먼지가 날리고 돌 틈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드나들던 고향집에는 작지만 이야기가 숨 쉬는 꽃밭이 있었다. 아이들은 꽃밭을 가꾸었고 꽃은 아이들을 키웠다. 꽃밭을 만들고 꽃씨를 뿌리는 일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다가올 시간이 줄 기쁨을 마음에 심는 일이다. 소박하고 정겹던 작은 공간, 꽃밭으로 불리던 곳은 생명과 변화가 살아있던 소소한 배움터였다. 채 한두 평 정도 좁은 땅이었지만 따스한 봄볕이 마당가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면 언제 심었는지 알 수없는 함박꽃이 아기 손가락처럼 생긴 새순으로 땅을 헤집고 올라왔고 초대받지 않은 냉이나 씀바귀도 비좁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봄을 음미했다. 장독대나 우물 가까운 곳은 오월 끝자락까지 풍만한 꽃을 달고 있는 모란(牧丹)이나 잎이 큼직한 키다리 꽃 차지였다. 필대로 핀 감나무 잎이 하늘을 가리면 꽃밭은 수난이 시작되었다. 오일장에서 사온 병아리가 어느새 중닭이 되어 먹이를 찾느라 온통 헤집었고 집을 뛰쳐나온 토끼도 꽃들을 망가뜨렸다. 어른들은 일 바빠 제대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만 햇볕과 이슬, 앞바람 명지바람이 장식을 바꾸었다. 터 잡아 핀 꽃들은 학교 교실로 옮겨져 선생님 칭찬과 학생들 시새움을 받았고 학교의 작은 꽃들을 집으로 옮겨심기도 했다. 상사화(相思花) 짙푸른 잎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무더운 여름이 오면 꽃밭은 열심히 달리아, 채송화를 피워댔지만 아이들은 산으로 물가로 옮겨가고 잡풀이 무성한 상태로 버려졌다. 장마 비에 배고픈 염소가 가끔 줄을 끊고 마당 경계가 허물어진 곳에서 바랭이 풀을 뜯었다. 과꽃, 맨드라미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고 붉은 맨드라미꽃술이 수탉 벼슬보다 훨씬 크고 멋져질 때쯤이면 여름 끝을 장식하던 봉숭아꽃은 백반과 짓이겨진 채 누나 친구들 손톱에 묶여 예쁜 추억이 되었다.

늦은 가을날, 잎이 져버린 목단과 커다란 키다리 대궁만 남아, 쌓인 감나무 낙엽들로 마당과 꽃밭이 구분조차 되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또 다른 내일을 준비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밭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아이는 몸과 마음이 훌쩍 컸다. 다들 떠난 시골집에는 돌무더기 몇 개로 흔적만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세상의 아름다움을 계절마다 만들어내던 그 작은 꽃밭이 생각난다. 인공 구조물과 아파트가 끝없이 늘어선 삭막한 도심에도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 가까이 꽃밭을 만들어 그들이 심은 꽃이 그들을 키우게 해야 한다. 그곳에서 키워낸 꽃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아이를 키우는 꿈을 꾼다. 이 힘든 봄, 바이러스 공포로 위축된 마음도 추스를 겸 마을 공터든 어디든 작지만 아담한 꽃밭이라도 만들면 어떨까.

 
이덕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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