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급훈
사라진 급훈
  • 경남일보
  • 승인 2020.03.1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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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초유의 신종 역병(疫病) 탓에 새 학기가 늦어진다. 예전 교실 칠판 위에는 태극기, 양옆에는 액자 형태의 교훈과 급훈(級訓)이 걸려 있었다. 그 시절 급훈은 간결했고 무게감이 느껴졌다. 집안 어른이 낮고 굵직하게 읽는 봉제사(奉祭祀) 축문처럼 감히 뭐라고 책(責)을 잡기 어려운 단어 몇 개가 무심한 듯 심오했다. 근면, 성실이나 정직, 인내 등 급훈은 학년별 차이가 거의 없었고 심지어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도 대동소이했다. 급훈이 걸려있는 교실에서 그 글귀대로 근면하고 성실하며, 정직하고 인내하는 학생이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지금에야 친일잔재로 매도당하기도 하지만 한국전쟁 후 국가체제는 물론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국민전체를 하나로 묶고 기본적 질서를 확립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며 인내하는 것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국민교육 도장으로서 지역사회 전체에 개방되어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으니 급훈은 단순히 반에서 일 년 간 배우고 익히는 명제를 넘어 학교와 연결된 지역사회 교육의미도 있었다.


‘동아연필 한 자루가 나라 일꾼 길러낸다’는 국산품 애용 표어가 애국심을 불어넣던 가난한 시절을 지나, 세계가 놀라는 고도성장을 이루고 세계 상위권 부국(富國)이 된 지금 와서 보면, 그때 급훈들이 조금은 어색하고 너무 권위주의적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쉼 없이 달려온 국가근대화 세대들에게는 가슴 뭉클하면서도 자긍심을 느끼는 단어다. 지금은 그런 급훈 쓰는 학교를 보기가 어렵다. 오스카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은 숙주와 기생충의 공생이라는 주제를 담았다. 부잣집에 기생하는 가지지 못한 자의 당당함이 어쩌면 근면이나 성실, 정직 등에 대한 사회적 기본 도덕률이 무너진 현대사회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 같아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거짓말과 배신은 정직한 사회의 붕괴는 물론 만연한 부도덕이 단순히 가진 자나 못가진 자의 갈등 관계를 넘어 많은 인간을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염치(廉恥)가 사라진 세상은 기생충이 사회의 주류가 되는 음침하고 어두운 미래를 예고한다. 총선 목전에서 국민의 신성한 주권 왜곡이 염려스러우리만치 억지로 선거법을 바꾸더니 이제는 유·불리에 따라 위성정당을 만든다. 게다가 국가적 재난마저 득표기회로 활용하는 정치인들의 꼼수부리기는 역겨운 기생충 사고다. 근면과 성실, 정직이 최소한의 도덕기준이 되도록 미래세대에 물려줄 정의(正義)를 다시 세워야한다. 국가가 정의롭지 못하면 그 국민은 세계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이덕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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