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걸음
걸음걸음
  • 경남일보
  • 승인 2020.03.2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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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수필가)
손정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밤새 자리를 지켰을까나. 돗자리 깔고 담요를 덮으며 말뚝잠도 잤다든가. 오구구 모여서 찬바람도 부르고 쉼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도 모은다. 한 발자국이라도 앞자리에 서려고 껑충껑충 뛰어가거나 쭐레쭐레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번호표를 받으려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졸음과 추위는 참을 수 있건만 오늘도 번호표를 받지 못하면 어쩌나.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할인점에 근무하는 사람이 겅중겅중 노루걸음으로 나온다. 맨 앞쪽에서부터 눈짐작으로 헤아리다가 구부슴하게 서 있는 어느 할머니 앞에서 뒷걸음질해 우뚝 서더니 칼금을 긋듯이 손바닥으로 내리 그으며 여기까지입니다, 라고 말한다. 어림잡아 오육십 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금 밖으로 주춤주춤 밀려났다. 헛걸음했다는 그 썰렁함에 우두망찰하게 서 있다가 느릿느릿 황소걸음으로 흩어지는데….

그래봤자 내일 또 오지 머, 뒤뚱뒤뚱 오리걸음을 걷는 아주머니.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저려오는지 몸을 이쪽저쪽 기우뚱거리며 걷거나 지게걸음을 걷는 아저씨. 손 전화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아기작아기작 걷는 씨암탉걸음. 뒤꿈치 들고 종종 뛰는 마흔 안팎으로 보이는 여자의 까치걸음. 줄 서기에 늦은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자꾸 뒤돌아보며 슬슬 옆으로 걷는 게걸음. 다른 곳으로 가려는 듯 급하게 걷는 밭은걸음. 쌍클하게 치켜뜬 눈으로 노려보다 팔을 홰홰 내저으며 빨리 걷는 왜죽걸음. 검은색 모자를 눌러쓰고 발끝을 바깥쪽으로 벌려 거드름을 피우며 느리게 걷는 팔자걸음. 뿔테 안경을 쓰고 팔을 벌리며 뚜벅뚜벅 걷는 화장걸음. 검질기게 발로 땅을 구르며 걷는 통통걸음. 삼신 제물에 메뚜기 뛰어들 듯 솟구쳐 오르듯이 다리에 힘을 주고 걷는 껑충걸음. 밀려난 것에 어깃장을 놓고 싶은 마음으로 어기적어기적 걷는 거위걸음. 저만치서 달팽이걸음을 걷던 할머니가 휴우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편다. 구붓하게 휘어진 등뼈가 흐르는 세월에 짓눌린 탓인지 제대로 펴지지 않는다. 야윈 어깨 위에 내려앉았던 누런 햇살이 그만 깨금발을 뛴다. 나무는 뿌리가 먼저 늙고 사람은 다리가 먼저 늙는다고 했다. 풋풋한 젊음이 눈 깜짝할 사이였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른 지나 쉰, 일흔 살까지 발맘발맘 오는데 아직도 까마득하게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그저 걸음을 걸을 때 앞발 뒤축에서 뒷발 뒤축까지의 거리일 뿐이라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지러운 온갖 일을 겪어본 사람들의 말씀이다. 아침나절 열한 시까지 오라고 했다. 열 시쯤 종종걸음으로 할인점 앞에서 금 밖인 줄도 모르고 서 있다가 선걸음에 뒤돌아섰다. 입 가리개 하나가 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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