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표 문양을 '卜'에서 '·'으로 바꾸자
기표 문양을 '卜'에서 '·'으로 바꾸자
  • 경남일보
  • 승인 2020.05.0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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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영 (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4·15 총선에 유권자로서 투표를 하였다. 마스크 쓰고 충분한 간격으로 줄을 섰다가 입구에서 발열검사 손 소독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장에 들어선다. 신분증 제시하고 선거인 명부에 전자펜으로 서명한다.

투표용지 두 장을 받고 나 홀로 기표소에 들어갔다. 끈에 달려 있는 제21대 국회의원선거 기표봉을 볼펜 쥐듯 세우고 신중하게 한번은 후보자 이름 다음 칸에 기표(記票)하고, 또 하나는 당명 옆 칸에 눌러 찍었다.

비닐장갑 손으로 투표용지를 접으려하니 미끄러져 쉽지 않다. 반복하면서 기표에 시선이 머물게 되었다.

기표 문양은 원형 테두리 속 지름막대에 반지름 막대를 비스듬히 붙여 반원 하나, 나머지 반원은 크기가 다른 두 부채꼴로 나눈 모양이다.

기표된 하나의 투표용지에는 지름막대가 오른쪽,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기울어 졌다. 선거 알림 자료의 기표 문양은 지름막대를 바로 세우고 반지름 막대는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하다. 문양을 보지 못하고 찍으니 지름막대를 바로 세우지 못하여 생긴 결과이다.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나오면서 문양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기표 문양은 점이나 점괘를 뜻하는 卜(복)자 이다.

은나라 때부터 주술사가 달궈진 쇠꼬챙이를 거북의 배딱지에 지져 갈라진 모양과 소리에 따라 길흉을 점쳤는데, 卜은 이때 갈라진 획과 구멍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점괘를 새겨 기록한 것이 갑골문이다.

21세기에 각종 자료와 대면 심사를 거친 후보자를 최종 선택하는 유권자는 투표용지에 卜자를 남긴 것이다. 투표는 점괘를 보러 갔다는 것인가!

기표에 관하여 에피소드가 있다.

여당은 可否(가부)를 묻는 투표에서 국회의원 3분의 2를 넘는 136표를 확보하고 있다고 믿었다. 뚜껑을 열자 135표 밖에 나오지 않아 1표의 행방에 대하여 말이 많았다. 소문인즉 여당 모 의원이 글자를 잘 몰라 可가 아닌 否에 찍은 것이다. 口가 있는 쪽에 찍으라는 지령을 받았지만 可에도 口가 있고, 否에도 역시 口가 들어있어 하필 否에 표를 던지는 결과로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선거 역사에서 기표 문양은 많은 변동을 가져 왔다. 1948년부터 1980년까지 기표용구에는 별도의 기준이 없었다. ○모양만 표시를 하면 됐기 때문에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투표를 진행해 왔다. 1985년 구멍 뚫린 플라스틱 원기둥 모양의 투표 도장에 인주를 찍어 표시했다.

1992년 제13대 총선부터 ○안에 人자를 삽입하여 사용하다가 1994년부터 卜자로 되었다. 2005년에 만년도장식 기표용구가 도입되어 별도 인주 없이 기표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과학적이고 쉬운 한글이 있어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모음은 우주의 형성에 기본이 되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재를 상형한 것이다.

·는 하늘을 본떠 둥글게 하고, ㅡ는 땅을 본떠서 평평하게 하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이 세 글자를 바탕으로 기본글자 11자를 완성했다. 사람이란 하늘을 이고 땅을 디디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처럼 좋은 언어를 가진 우리는 축복받은 민족이다.

기표 문양을 ·으로 하면 이리저리 봐도 같은 모양이며 뜻은 깊고 단순하며 명백하다. 바야흐로 점괘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찍는 것은 하늘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당선은 천심을 많이 얻은 것이요 낙선은 천심을 덜 얻은 것이라 낙선자는 잘 듣고 고개 숙이는 후보자로서 새롭게 등장한다.

선거 기표 문양을 은나라 시대 점괘로 사용되었던, 바로 세우기 어려운 卜자 문양을 사용해야할까.

우리의 선거에 기표 문양을 ·으로 하면 빛나는 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축제가 되는 것이다.
 
안명영 (수필가, 전 명신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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