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4) 한국 최초 8000m 연속 등정(하)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4) 한국 최초 8000m 연속 등정(하)
  • 경남일보
  • 승인 2020.06.0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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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샤팡마 정상에 선 김영태(왼쪽)와 남선우
시샤팡마 정상에 선 김영태(왼쪽)와 남선우

 

“시샤팡마 등반을 할 수 있겠나?”
김관준 원정대장이 물었다. 남선우 등반대장은 출국 전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훈련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이번 초오유 등반에서도 캠프 건설에 직접 나서면서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사실 그는 초오유 등반에서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다. 시샤팡마는 포기하는 쪽으로 스스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말았다. “시샤팡마도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도 답변에 놀라고 말았다. 

남선우 등반대장 “후회 없는 등반하고 싶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초오유 등정 후 거의 초주검이 될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했다. 등반을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을 실패한 것이 가슴 깊숙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시 8300m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 공격을 감행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왜 그때 밀어붙이지 못했는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한으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또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도전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실제로 남선우 등반대장은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8350m 지점에서 뒤돌아섰다. 당시 후퇴 결정은 너무 성급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남선우는 ‘후회 없는 등반’을 위해 시샤팡마 등반을 결정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대원들
정상으로 향하는 대원들

 

김관준 대장, 추가 경비 지원
김관준 원정대장은 시샤팡마 등반에 필요한 추가 경비 1만2000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원정대는 초오유에 이어 시샤팡마 등반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초오유 등정에 성공한 남선우와 김영태는 시샤팡마를 오른다면 한국 원정 사상 최초로 8000m 2개봉을 잇따라 성공하는 산악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원정대는 곧바로 니알람으로 이동했다. 남선우 등반대장은 대원을 선발해 시샤팡마 등반에 나서기로 했다. 시샤팡마를 등반하는 대원과 남을 대원들을 선택한다는 것은 산악인들에게는 야속한 결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남선우의 생각과 신념은 확고했다.
“김관준 원정대장이 당시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거액을 내놓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원정대원 모두가 시샤팡마를 등반하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경비를 최대한 적게 사용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무엇보다 겨울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신속한 등반을 위해서는 등정할 성공률이 높은 4명의 대원을 데리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 나서
결국 남선우 등반대장과 김영태, 조상현, 남기칠 대원이 시샤팡마 등반에 나서기로 했다. 니알람에서 등반대는 약 300㎏의 식량과 장비만 챙겼다. 9월 26일 작은 버스로 시샤팡마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대원들을 태운 버스는 3시간을 달린 후 끝없이 펼쳐진 초원지대를 2시간 더 이동했다. 황량한 모레인 지대를 지나 만난 시샤퍙마 베이스캠프는 넓은 초원지대에 있어 안락하고 편안했다. 실제로 5000m 베이스캠프에는 티베트등산협회가 지은 큰 화장실 건물도 있었다. 전진 베이스캠프(ABC)가 있는 5600m까지는 걸어서 7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대원들은 야크 5마리에 식량과 장비를 싣고 떠났다. 남선우는 티베트 등산 관계자에게 5일 후 야크 5마리를 ABC로 보내주라고 요청했다. 그는 머릿속에 등반 계획을 세웠다. 그는 당시 계획을 설명했다. “초오유 등정으로 고소 적응이 된 상황에서 휴식이 필요 없었다. 식량과 장비를 최소화해 가장 이른 시간에 등정하고 내려올 계획이었다.” 9월 29일 김영태, 조상현, 남기칠 대원과 밍마 셰르파는 1캠프(6300m)에 텐트와 식량 3일 치를 올려놓고 돌아왔다. 다음 날 전 대원은 1캠프로 향했다. 넓은 설원지대를 통과하자 외국 원정대 텐트가 눈에 들어왔다. 러시아 원정대는 텐트를 설치하고 하산한 상황이었으며, 등정에 성공한 스페인과 프랑스팀은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10월 1일 7000m에 2캠프 설치
1992년 9월의 마지막 날 그들은 티베트 6300m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보냈다. 별들은 수없이 쏟아져 내렸다. 10월 1일 대원들은 이틀분의 식량과 텐트 2동을 지고 2캠프로 향했다. 가파른 눈길을 3시간 정도 오르자 넓은 설원에 도착했다. 정상이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다시 지루한 눈의 평야를 2시간 정도 올라 2캠프 사이트에 도착했다. 해발 6800m였다. 대원들은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3캠프를 건설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남선우 등반대장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선우 등반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2캠프로 오면서 정상으로 가는 루트를 볼 수 있었다. 등반 루트는 긴 서릉을 지나 왼쪽으로 북서릉이 이어지고 있었다. 2캠프를 설치하려고 했던 해발 6800m에서 정상으로 가는 북서릉을 오르려면 한참을 가야 했다. 현재 위치에서 캠프를 설치하면 준비해 간 식량이 부족하고 시간도 더 오래 걸릴 것 같아 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그가 선택한 것은 2캠프를 200m 정도 올려 7000m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상으로 바로 간다는 전략이었다. 그들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했다. 약 2시간 30분 정도 올라 북서릉 바로 밑에 도착했다. 북서릉이 시작되는 급사면을 깎아 2캠프를 만들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대원들은 저녁을 먹기 위해 모여들었다. 

남선우·김영태·조상현, 정상 공격
남선우 등반대장은 자신의 계획을 발표했다. “지금 날씨가 아주 좋다. 하지만 언제 나빠질지 모르고, 식량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내일 새벽에 2캠프에서 곧바로 정상 공격을 하는 것이 어떻겠나?” 대원들은 모두 동의했다. 그들은 날씨가 나빠지는 등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남기칠 대원은 2캠프에 남기로 했다. 공격조는 남선우 등반대장, 김영태, 조상현, 밍마 셰르파로 결정했다. 10월 2일 새벽 3시에 출발 계획이었다. 최종 결론이 나자 그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상 공격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6시간 정도였다. 대원들은 장비를 챙기고, 정상 공격에 없어서는 안될 물을 끓여 보온병에 채웠다. 10월 2일 새벽 3시. 그들은 미련없이 텐트를 나와 정상으로 향했다. 시샤팡마 7000m에 헤드렌턴이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불빛도 따라 춤을 췄다. 아이젠이 걸을 때 단단히 얼어붙은 눈과 부닥치면서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적막감에 눈을 밟는  소리만이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잘 결빙된 눈은 걷기에는 좋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한 발짝만 잘못 내딛는다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시샤팡마 남서벽 전경

 

아이젠 문제로 조상현 아쉬운 후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하얀 설벽을 끝없이 올랐다. 3시간 정도 오르자 당초 사용하려던 3캠프 사이트가 나왔다. 설릉에 올라서자 강한 바람이 그들을 몰아붙였다. 조상현 대원이 움직임이 여의치 않았다. 아이젠이 벗겨져 새로 착용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아이젠에 달린 고정 부분이 신발에 제대로 착용할 수 없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아이젠이 없으면 사실상 등반을 할 수 없다. 빙벽이 많은 설벽지대에서 아이젠 없이 등산과 하산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도박과도 같았다. 특히 7300m가 넘는 고산에서는 조난과 직결된다. 남선우 대장은 조상현 대원에게 등반을 포기하고 안전하게 하산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조상현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8000m 등정이라는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해가 뜨면 하산하기로 하고, 정상으로 향하는 3명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침 7시 동쪽에서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해는 대원들을 비추면서 서서히 세상을 깨우고 있었다. 시샤팡마 주변 산들이 희미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등반 속도는 떨어지고 있었다. 시샤팡마를 등반한 지 5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등반하면서 체력은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8000m에 가까워지자 그들은 두세 걸음을 내딛고 머리를 숙였다. 눈에 닿은 머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동안 계속 들썩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최대한 입과 코를 벌려 가쁜 숨을 내쉬고 산소를 들여 마셨다. 희박한 공기를 마시며 충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10월 2일 오전, 한국 최초 연속 등정
3시간 동안 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밍마 셰르파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상 바로 아래 바위 밑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약 20m에 달하는 낡은 로프가 걸려 있었다.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급사면을 반드시 올라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며 1시간 정도 설사면을 올랐다. 힘든 봉우리를 올라서자 날카로운 설릉이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50m 로프로 안자일렌(일정한 간격을 두고 로프를 연결해 묶어 오르는 등산 기법)으로 천천히 전진했다. 10월 2일 오전 11시 20분. 남선우, 김영태, 밍마 셰르파는 정상 공격 8시간 20분 만에 8027m 시샤팡마 정상에 섰다. 한국 히말라야 원정 사상 8000m 2개 산을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초오유를 등정한 지 불과 5일 만에 시샤팡마를 등정하는 기쁨을 누렸다.
남선우 등반대장은 “정말 힘들었다. 8000m 2개봉을 잇따라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몸으로 실감했다. 2개의 산을 올랐다는 벅찬 감격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저 힘들게 올라왔다는 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제 고통스러운 등반을 마쳤다는 안도감이 밀려왔을 뿐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1991년 초오유·시샤팡마 2개봉 연속 도전사>

대한산악연맹과 한국히말라얀클럽은 1991년 한국 최초로 8000m급 2개봉 연속 등정에 도전했다. 대상 산은 티베트에 위치한 시샤팡마·초오유였다. 이 원정은 처음으로 티베트에서 이뤄지는 의미 있는 등반이었다. 동시에 2개봉을 연속 등정한다는 취지에서 산악인들은 물론 국내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대한산악연맹(회장 임철순)은 김명수 대장을 비롯해 전국에서 선발한 15명의 대규모 원정대를 구성했다. 국내에서 활약하던 장봉완 부대장(38)·김재봉(33)·윤길수(33)·곽상태(33)·김창선(31)·엄홍길(31)·김재수(30)·이주이(30)·홍경표(29)·최정길(27)·최병수(27)·고상현(26)·강신원(24)·김수야(23) 대원이 선발됐다. 모두 20~30대의 혈기 왕성한 대원들이었다. 경남에서는 김재수 대원이 참여했다.
원정대는 시샤팡마에 도착했다. 시샤팡마는 8000m 산 가운데 가장 낮은 산이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후 입국을 금지하면서 1964년 중국에 의해 가장 늦게 등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8000m 14개 가운데 초등 기록을 갖지 못한 중국은 200명이 넘는 산악인을 동원해 10명이 등정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1980년 산악인들에게 개방한 이후 독일이 두 번째로 등정했다.
원정대는 1982년 영국이 오른 중앙 암릉 직선 루트를 선택했다. 1991년 9월 23일 베이스캠프(5100m)에 도착한 원정대는 1주일 만에 1캠프(5800m)를 설치했다. 10월 2일부터 본격적인 암벽 등반에 나선 대원들은 5일 7100m까지 고정로프를 깔았다. 1차 정상 공격조로 뽑힌 김창선·김재수 대원은 6일 새벽 1캠프를 출발, 7100m까지 9시간 만에 1300m를 올랐다. 그들은 설동을 파고 비박을 감행했다. 다음날 오전 7시 40분 비박지를 떠나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전 11시 대원들을 날려버릴 것 같은 강풍과 혹독한 추위로 더 이상 전진이 어려웠다. 그들은 3시간에 걸쳐 설동을 파고 침낭도 없이 하루를 보내야 했다. 
10월 8일 바람이 약해진 틈을 타 김창선·김재수 대원은 정상 공격을 재개했다. 오전 10시 두 대원은 시샤팡마 정상에 섰다. 등정 소식을 접한 원정대는 초오유로 이동했다. 10월 20일 초오유 전진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원정대는 10월 25일 3캠프(7200m)를 설치했다. 10월 29일 엄홍길·김창선 대원은 셰르파 1명과 함께 정상 공격에 나섰지만 록밴드(7400m)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한국히말라야클럽(회장 박철암)은 박철암 단장을 비롯해 오인환 대장(45)·허영호 등반대장(37)·이시웅(35)·김춘기(35)·김범택(28)·홍윤기(25)·이선호(25)·이기웅 대원(55)이 참여했다. 원정대는 중국 북경~성도, 그리고 티베트 라사를 경유해 초오유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1차 정상 공격에 실패한 원정대는 10월 23일 두 번째 도전했다. 당시 8000m 3개봉을 등정한 허영호 등반대장과 오인환 대장, 김범택 대원이 8100m까지 진출했지만 거센 눈보라를 뚫지 못했다. 그들은 정상을 불과 100m 남겨두고 후퇴해야 했다. 시샤팡마로 이동한 원정대는 1캠프에 진출했지만 이미 11월을 넘기는 바람에 등반을 포기하고 말았다. 한국 최초의 8000m 2개봉 연속 도전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들의 2개봉 연속 도전은 등정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 의미 있는 등반이었다.
-참고 남선우 저 ‘역동의 히말라야’

 

시샤팡마 베이스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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