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전차 막아선 학도병을 아시나요
북한군 전차 막아선 학도병을 아시나요
  • 임명진
  • 승인 2020.06.24 1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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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하는 굉음과 함께 섬진강 쪽에서 집채만 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북한군이 우리 부대를 향해 쏜 첫 포탄이었다.

이렇게 화개전투가 시작되었다. 1000여 명의 북한 정규군에 대항해 180여 명의 우리 학도병들은 화개 땅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남쪽 저지선이 뚫리게 되고 하동 주민들이 피란갈 수 있는 시간을 잃게 된다는 생각에 버티고 또 버텼다. -‘학도병의 생애 첫 전투, 화개전투를 아시나요(하동교육지원청 펴냄)’ 중에서


하동 화개면, “진격 막아라” 처절한 전투

1950년 7월 25일 난생 처음 보는 북한군 전차가 굉음을 내며 하동군 화개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군은 하동과 진주를 점령하기 위해 대공세를 취했다. 당시 구례를 지나 하동의 지척까지 진격한 북한군 6사단의 선봉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1000여 명의 정예부대였다.

이들을 막기 위해 일단의 병력들이 섬진강 부근에 진을 쳤다. 하지만 그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전투복 대신 교복을 입고, 철모 대신 교모를 쓴 15~18세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오자 전남 여수와 순천, 벌교, 보성 등 18개 중학교에서 180여 명의 학생들이 나라를 구하겠다며 혈서를 쓰고 학도병에 자원했다.

이 전투가 6.25전쟁의 수많은 전투 중에서 처음으로 학도병이 참전한 화개전투이다.

화개전투는 북한군의 서부경남 진입을 지연시킨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학도병 7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학도병들이 처절한 전투를 벌이며 적의 진격을 늦추자 그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국군과 미군이 27일 하동에 투입돼 또다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채병덕 사령관과 수백여 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두 차례의 전투로 북한군은 7월말까지 하동에 발목이 묶였다. 한시가 급박한 상황에서 학도병들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간신히 최악의 위기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학도병들은 이후 진주 남강 방어선과 진동리지구전투, 낙동강 방어전 등에 투입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잊혀진 어린 영웅들, 구국魂 재평가 절실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오로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펜 대신 소총을 손에 든 채 전쟁에 뛰어든 학도병들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전쟁 당시 학도병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수만여 명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의 상황이 극히 불리하게 전개되자 이승만 정부는 18세 이상을 대상으로 징집령을 내렸다. 이들은 정식으로 군번을 받은 군인이었지만 나이가 어린 학도병들은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학도병들은 소총수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돼 직접 싸우기도 했지만 연합군 통역과 보급, 행정, 통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역할을 했다.

연합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이승만 정부는 1951년 2월 종군학생 복교령을 내렸다.

학도병 출신 조재섭(88)씨는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되고 서울이 수복되자 정부에서 복교령을 내렸지만 일선 부대에서 학도병이 맡고 있는 역할이 있다 보니 군대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포항 등지의 낙동강 방어전에 참전한 조씨는 학도병에 대한 재평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6년여 동안 진주지역 학도병의 정확한 규모와 실체를 파악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지난 2018년 11월에는 전국 최초로 3개 학교 합동으로 된 ‘진주 학도병 6.25참전명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

당시 진주의 명문학교로 이름 높았던 진주농고(현 경남과기대), 진주고,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대) 학생들은 전쟁이 터지자 대거 자원입대했다.

조씨는 2012년 4월부터 학도병을 배출한 이들 3개 학교를 찾아 당시 1950년 6월25일부터 1951년 2월 복교령을 내린 그 사이에 군입대한 기록이 있는 학적부를 뒤져 모두 152명의 학도병을 찾아냈다.

어느새 6.25전쟁 70주년을 맞았지만 조씨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학도병에 대한 관심이 이래선 안될 텐데 하는 생각만 든다.

조씨는 “매년 정기적으로 위령제도 올리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 교육과 학도병의 업적을 가르칠 수 있으면 좋은데, 쉽지가 않다”고 했다.

다른 지역은 학교에 호국동아리가 있어 보훈시설 참배도 가고, 학생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진주는 아무도 찾는 이 없고 먼지만 쌓여 있는 꼴을 보니 비참한 기분마저 든다고 했다.

조씨는 “힘들게 학도병 기념비를 진주에 세웠는데, 세울 때만 거창하고 이후에는 나 몰라라 해선 안 된다”면서 “학도병의 추모와 평가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라고 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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