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7) K2, 끝내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27) K2, 끝내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6.2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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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산악동지회, 단일 산악회 최초 도전
폭설·강풍으로 8300m에서 아쉽게 후퇴
“1989년 에베레스트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세계 2위봉 K2에 도전장을 던졌다. 지역 산악인들이 단일팀으로 1위봉에 이어 2위봉까지 등정한다면 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K2를 등반하게 된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기적을 만들고 싶었다.”

1994년 마산산악동지회(이하 악동)는 K2 원정대를 구성했다. 1989년 한국에서 두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뤄낸 악동은 세계 2위봉 도전에 나섰다. 원정대는 에베레스트에 참여했던 대원 대부분이 동참했다. 김인태 대장·최재일 부대장·이상곤 등반대장·구자억(의료)·김석수(기록)· 김병오(기록)·조효제(장비)·조광제(행정)·제승우(식량)·박희택(장비)·이근배(식량)·김범택(수송)·김민효(촬영)·조상국(수송) 등 14명이 참여했다.

 
 
지상의 낙원 파유에서 결의를 다지다

당시 에베레스트 등정에 고무된 마산은 K2 원정대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역 기업과 기업인, 그리고 산악인들의 막강한 후원을 등에 업고 원정대는 파키스탄으로 향했다. K2는 파키스탄 카라코람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홀로 서 있다. K2를 보기 위해서는 1주일 이상 산 넘고 물 건너, 빙하를 지나야 겨우 볼 수 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발토르 빙하를 3일간 걸어야 한다.

1994년 6월 7일 파키스탄 카라코람에 위치한 파유(Paju 3390m)에 도착했다. 파유봉(6610m) 밑에 위치한 파유는 만년설이 녹아 내려 작은 계곡이 있다. 풍부한 물은 울창한 숲을 이뤘다. 자연적인 조건으로 K2 원정에서 숲이 있는 유일한 곳으로 발토르 빙하를 건너기 전 대원들과 포터들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반드시 쉬어가는 휴식지다. 원정대는 소나 양, 염소를 잡아 포터들에게 나눠 준다. 포터들은 고단한 여정을 시작하기 전 고기를 먹으며 춤과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앞으로 얼음과 바위, 먼지, 눈, 위험한 크레바스를 통과해야 하는 고통의 행군을 시작해야 한다. 빙하지대에서는 땔감을 구할 수 없어 이곳에서 주요 음식인 짜파티를 최대한 많이 구워 가지고 간다. 원정대원과 포터들은 함께 어울려 춤과 노래를 부르고 K2 무사 등정을 기원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발토르 빙하를 건너다

6월 9일 드디어 마산 산 사나이 14명과 수백 명에 달하는 포터들이 행군을 시작했다. 그들은 파유를 출발한 지 4시간 만에 세계에서 가장 긴 발토르 빙하와 마주했다. 총 길이가 65㎞에 달한다. 3일간 발토르 빙하를 건너 콩고르디아에 도착한 원정대는 다시 고드윈오스틴 빙하를 따라 2일간 걸었다.

6월 13일 원정대는 해발 5100m K2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6월 15일 원정대는 전진캠프(ABC)를 설치하기 위해 전 대원이 나섰다. K2 노멀 루트가 시작되는 지점은 베이스캠프에서 워낙 멀어 전진캠프를 반드시 세워야 한다. 전진캠프에 식량과 장비를 비축하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고 대원들은 체력을 아낄 수 있다. 대원들은 전진캠프에 텐트 6동을 설치하고 각종 장비를 수송했다. 고소가 적응되기 전 3시간 정도 걸리던 것이 1시간으로 줄어들면서 본격적인 등반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K2 전진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대원들.
6월 17일 1캠프(6100m)를 만들기 위해 김범택·박희택·조효제·조광제 대원이 등반에 나섰다. 그들은 고정로프를 깔며 전진했다. K2는 만만치 않았다. 통상적인 루트로 올랐지만 처음부터 경사가 심한 검은 암벽은 거대한 성벽처럼 느껴졌다. 힘들게 1캠프에 도착한 대원들은 텐트 2동을 설치하고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대원들은 순조롭게 고소적응을 마쳤다. 6월 23일 2캠프(6700m) 건설에 나섰다. 1캠프에 도착한 대원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처참하게 부서진 텐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동은 완전히 부서졌고, 다른 1동은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1캠프를 힘들게 보수한 대원들은 2캠프로 향했다. 다음날 2캠프에 도착해 텐트 1동과 식량과 장비를 남겨놓고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2캠프 건설에 나선 후 하산하고 있다.
멀고도 먼 3캠프

좋은 날씨가 계속되면서 등반 일정도 차질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김인태 대장은 회상했다. “전진캠프에서 2캠프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했고 식량과 장비를 집중적으로 3캠프로 올리는 일만 남았다. 날씨만 좋다면 6월 말이나 7월 초 정상에 설 것으로 내심 기대했다. 우크라이나 원정대가 방문했다. 그들은 우리가 설치한 고정로프를 사용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2캠프에서 3캠프로 가는 고정 로프를 우크라이나가 설치해 달라고 했다. 대원들의 체력은 물론 식량과 장비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에 역제안했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았다. 김인태 대장은 전 대원을 베이스캠프로 하산시켰다. 등반을 못하는 날 대원들이 영양을 보충하고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한 조치였다. 6월의 마지막 날 3캠프(7400m)를 건설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전 대원이 하루 시간을 두고 베이스캠프를 떠나 높은 곳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출발한 대원들은 7월 3일 3캠프에 도착했다.

 
1994년 악동 K2 등반
소리 없는 복병…눈(雪)

그러나 다음날 날씨가 변하기 시작했다. 김인태 대장은 전 대원들을 베이스캠프로 후퇴시켰다. 베이스캠프에는 비가 내렸고 각 캠프에는 눈이 바람에 날렸다. 다행히 7월 5일 날씨가 호전됐다. 김인태 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아니 날씨가 기다려주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은 김병오, 조광제, 조효제 대원을 중심으로 한 1조가 출발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지원조를 보내 3캠프까지 지원했다. 7월 10일 3캠프에 머물고 있던 대원들은 정상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팀이 가장 먼저 정상 등정에 나섰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명은 컨디션 좋지 않아 하산했다. 나머지 3명은 정상으로 향했다. 몇 시간 후 날씨가 악화하면서 우크라이나 산악인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베이스캠프에서도 더이상 그들을 관찰할 수 없었다. 7월 11일 3캠프에는 심한 바람r과 함께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상으로 향하던 우크라이나 대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사태로 사라진 우크라이나 대원들…

김인태 대장은 순간 불안감에 몸서리를 쳤다. 베이스캠프에 김인태 대장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베이스캠프, 베이스캠프!” 7월 12일 새벽 3시.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김인태 대장과 대원들은 직감적으로 사고를 예감했다. “눈사태다. 3캠프가 눈사태에 휩쓸렸다.” 김인태 대장은 즉시 대원들을 하산시켰다. 우크라이나 팀은 구조대를 곧바로 올려보냈다. 하지만 구조대 역시 5일간 4캠프에 발이 묶여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원정대는 대원 3명을 결국 찾지 못하고 등정을 포기했다.

조광제 대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보다 먼저 등정에 나선 우크라이나 대원들에게 등정을 기원하고 무전기도 빌려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난 후 기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빠르게 전진하면서 약 8200m 지점의 보틀넥(bottlenek 좁은 등반로)까지 갔을 것이다. 하지만 폭설과 강풍을 만나 사고를 당한 것 같다. 만약 우리도 함께 등정에 나섰다면 삶과 죽음이 엇갈렸을지도 모른다.”

7월 15일 전열을 정비한 대원들은 베이스캠프를 떠나 제1캠프에 도착했지만 텐트는 부서지고 장비는 사라져 버렸다. 2~3캠프도 마찬가지였다. 대원들은 텐트를 보수하고 3캠프에 진출했다. 7월 18일 심한 블랙 피라미드에서 낙석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눈사태는 그들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폭설과 강풍을 맞으며 8300m까지 올랐지만 후퇴하고 말았다.

죽음의 지대에서 3일을 버티다

7월 21일 4캠프(7900m)에서 정상 공격을 기다리던 대원들은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렸다. 2~3일만 날씨가 좋았다면 충분히 등정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날씨는 원정대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4캠프에서 3일을 버텼다. 김인태 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더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7월 24일 눈물을 머금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김인태 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을 받아 K2까지 왔다. 대원들은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하루나 이틀만 날씨가 좋았다면 정상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날씨가 우리를 거부했다. 등정을 욕심내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했다. 등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원들의 안전이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사고 없이 세계 2위봉 K2를 등반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됐다”고. 하지만 김인태 대장과 대원들은 베이스캠프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웃으면서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K2의 위용


<K2 등반사>
1856년
영국 측량장교 T. G 몽고메리 대령은 카라코람에서 200㎞ 떨어진 곳에서 ‘높은 산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관찰했다. 몽고메리는 고봉들을 카라코람(KARAKORAM) ‘K’를 빌려 K1, K2로 번호를 붙였다. 2년 후 K2는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밝혀졌다.
같은 해 독일 과학자 아돌프 슈라긴트바이트는 카라코람 동부지역 무스타그 고개를 통과했다. 발토르 빙하를 거슬러 올라간 그는 K2에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유럽인으로 기록되었다.

1861년
영국 H. H 고드윈 오스틴 대령은 카라코람 서부 지역을 조사했으며 최초의 개념도(1:500,000)를 작성했다. K2로 접근하는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1892년
영국인 W. M 콘웨이가 6명의 소규모 원정대를 구성해 카라코람을 탐사했다. 발토르 빙하와 고드윈 오스틴 빙하가 만나는 콩고르디아까지 진출했다. 프랑스 파리 공코드 광장을 연상해 지은 이름이었다. 그들은 K2 등반에 나서 6890m까지 올랐다.

1902년
엑케슈타인이 이끄는 국제원정대가 최초로 등반을 시도했다. 북동릉을 통해 정상을 오를 계획이었다. 그러나ㅣ 6200m 지점에서 폐수종에 걸린 대원으로 인해 포기하고 말았다.

1909년
이탈리아 아브루치 대공이 이끄는 원정대가 등반에 나섰다.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임마누엘 2세의 조카인 아브루치는 대규모 원정대를 구성했다. 그는 남동릉(이후 아브루치 루트)이 가장 오르기 쉬운 루트라는 것을 알고 등반을 시작했다. 베이스캠프(5030m)를 출발해 고소캠프(5560m)를 설치하고 6000m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설치한 로프가 끊어지면서 등반을 포기하고 인근 스캉캉리(7554m)를 도전했다. 1캠프(6300m), 2캠프(6800m)를 순조롭게 설치하고 7월 12일 7150m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7400m를 넘어서 정상을 150m 정도 남겨두었다. 하지만 악천후로 더 이상 전진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인류가 오른 기록을 200m 정도 끌어오리는 성과를 거뒀다. 사진작가 비토리오 셀라는 K2를 비롯해 발토르 빙하 등 수많은 사진을 남겨 유럽에 K2 존재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1938년
찰스 휴스턴이 이끄는 미국 1차 원정대가 남동릉으로 등반에 나섰다. 5명의 대원과 9명의 셰르파들로 구성된 원정대는 ‘검은 피라미드’로 불리는 마의 구간을 돌파했다. 그들은 7750m까지 진출했다. 비록 등정에 실패했지만 남동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을 돌파하는 성과를 올렸다.

1939년
미국 2차 원정대가 등반에 나섰다. 독일에서 귀화한 프리츠 비스너가 이끄는 원정대는 산소를 사용하지 않고 등반했다. 고산병으로 대원 1명이 숨지고 그를 구하러 간 셰르파 3명이 죽었다. 하지만 비스너는 셰르파 파상 다와 라마와 함께 8000m를 돌파하고 9캠프를 설치했다. 그들은 8400m를 넘어서 정상을 200m 정도 남겨두었다. 셰르파는 더 이상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하자고 제안했다. 일단 후퇴한 비스너는 2차 정상 도전에 나섰지만 아이젠을 잃어버려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은 K2 세계 초등의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리고 말았다.

1953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찰스 휴스턴은 3차 원정대로 이끌고 돌아왔다. 원정대는 등반중 5월 29일 영국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조롭게 등반하던 원정대는 8캠프(7700m)에서 악천후로 고립됐다. 대원 1명이 고소로 사경을 헤매자 폭풍설을 뚫고 하산을 시작했다. 로프를 묶고 하산하던 대원이 발을 헛디뎌 추락하자 찰스 휴스턴을 비롯한 5명의 대원이 잇따라 떨어졌다. 피트 세닝은 순간적으로 로프를 낚아챘다. 장갑과 손은 마찰로 탔지만 그는 로프를 놓지 않았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A. 킬키는 실종되고 말았다.



 
1954년 이탈리아 원정대 기념사진. 앞줄 서 있는 사람이 아르디토 데시오 원정대장.
7월 31일 정상에 선 아칠레 콤파뇨니와 리노 리체델리.

1954년
아르디토 데시오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원정대가 도착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산악인 11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마지막 9캠프(8050m)를 설치했다. 7월 31일 2명의 대원은 정상으로 향했다. 그들은 오후 6시 겨우 정상에 섰다. 이탈리아가 1909년 처음으로 등반을 시도한 후 45년 만에 세계 초등하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원정대는 초등한 대원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 K2 초등자가 아칠레 콤파뇨니와 리노 라체델리였다는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공개됐다.

한국 도전사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기념하기 위해 첫 도전장을 내밀었다. 대한산악연맹은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후 9년 만에 세계 2위봉 K2 등반에 나섰다. 3년 준비를 거친 원정대는 김병준 대장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16명의 대원을 선발했다. 8월 3일 새벽 5시 5캠프(8250m)를 출발해 11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장봉완, 김창선, 장병호 3명이 정상에 섰다. 한국은 1954년 이탈리아가 세계 초등을 이뤄낸 후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폴란드, 스페인 등에 이어 등정에 성공했다. 마산산악동지회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등정에 나섰지만 악천후로 아쉽게 실패했다.

<1994년 마산산악동지회 K2 등정 취지문>

인간의 끊임없는 탐구정신이 문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계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지방단일팀으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후 또다른 고봉을 향해 준비해온 저희들이 이제 세계 제2의 고봉인 K2를 등정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다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8000m가 넘는 고봉들이 14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의 사업으로 이 고봉들을 악동의 이름으로 모두 등정하기를 하고 代代로 이어가고자 합니다.
이것은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을 몸소 실천하는 정신을 심어주고자 함이요, 또한 그 맥을 이어놓고자 합니다.
하얀산!
만년설이 덮혀있는 이 높고 험준한 산에서 우리들의 결집된 힘으로 하나의 과제를 향해 착실히 정진해 갈 것입니다.
관심 가지신 많은 분들과 산악 선·후배님들의 지도편달을 바라며 저희들의 장도에 용기와 힘을 함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94.4.
원정대장 김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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