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3) ‘쉬바신의 몸통’ 케다르나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3) ‘쉬바신의 몸통’ 케다르나스
  • 경남일보
  • 승인 2020.08.0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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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마차푸차레산악회, 남벽 한국 초등 도전장
1986년 가우리상카 세계 초등 영광 재현 노려
1캠프에서 2캠프로 향하는 대원들


진주 마차푸차레산악회는 1997년 인도 가르왈히말라야에 있는 케다르나스(6967m) 등반에 나섰다. 1986년 가우리상카 동계 세계 초등을 달성한 마차푸차레 선배들의 영광을 잇기 위해 케다르나스 남벽 한국 초등을 위한 원정대를 구성했다. ‘쉬바신의 몸통’이라는 뜻을 가진 케다르나스는 인도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산으로 유명하다. 인도에 있는 수많은 힌두교 사원 가운데 야무노트리 사원(3185m), 강고트리 사원(3046m), 바드리나트 사원(3133m), 케다르나스 사원(3584m)이 4대 사원은 가장 유명하다. 특히 케다르나스 사원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쉬바신의 몸통’인 케다르나스 산이 있어 죽기 전 인도인들이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워낙 외진 곳이라 한국 원정대가 찾지 않았다. 케다르나스 남벽은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는 약 3000m에 달하고 암벽 구간도 2400여 m에 달하는 고난도 등반 루트다. 1997년 마차푸차레산악회는 한국 최초로 케다르나스 원정대를 조직했다. 민병태 대장을 비롯해 박희권 부대장·이남영 등반대장·유동훈·한동호·박명환·이성기·허외탁·김봉회·김유정·이주환 대원 11명이 참여했다.

1997년 인도 광복절인 8월 15일 인도 뉴델리에 도착했다. 다음 날 인도산악연맹(IMF)에서 등반 브리핑을 실시하는 등 행정 절차를 마친 후 8월 19일 버스를 이용해 카라반에 나섰다. 원정대는 나흘간 카라반을 시작해 8월 23일 해발 4100m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첫 아침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로 시작했다. 대원들은 고소 증세를 느꼈고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가장 분주히 베이스캠프를 정리하던 허외탁 대원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김봉희 대원 심한 고소로 인해 케다르나스 사원까지 하산하기로 했다. 비가 그친 틈을 타 식량과 장비를 캠프별로 분류했다. 식량 담당인 이성기 대원만이 고소에 잘 적응하며 저녁 늦게까지 식량과 장비를 정리했다. 이날 오후 5시쯤 민병태 원정대장과 박희권·유동훈, 김유정, 이주환 대원이 비를 흠뻑 맞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전 대원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대원들은 그동안 카라반을 서로 위로하며 소주를 곁들인 만찬을 즐겼다. 어둠이 내려앉자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는 베이스캠프에는 빗소리만이 요란했다.

 
1캠프로 가는 거대한 빙하
빗속에 전진캠프 설치

8월 27일 오전 비가 멈추자 민병태 대장과 이남영 등반대장·한동호·이성기·김봉회 대원이 등반 루트를 파악하기 나섰다. 대원들은 1987년 일본 원정대가 눈사태로 분실한 카메라와 카라비너, 아이스바일을 찾아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28일에도 예외 없이 비가 내렸다. 매일 비가 왔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올해 원정대는 한국팀이 유일했다. 고소포터도 고용하지 않아 오로지 원정대원들이 스스로 길을 만들고 올라야 했다.

이날 오전 10시 이남영 등반대장과 유동훈·한동호·이성기·김봉회·박명환 대원이 전진 베이스캠프 작업을 위해 출발했다. 비와 심하게 낀 가스와 크레바스를 피해 가는 바람에 루트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거대한 케다르나트 빙하를 건넜고 약 5시간 후 전진캠프(4500m)에 도착했다. 고도는 400m에 불과했지만 30kg에 달하는 배낭 무게는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전진캠프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대원들은 캠프를 설치할 장소에 피켈과 삽을 이용해 눈과 얼음을 파내고 텐트 2동을 설치했다. 텐트 주변에는 케다르나스를 초등한 이탈리아팀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스노바 등 장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마 다른 원정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았다. 식량과 장비를 남겨두고 해가 진 오후 7시쯤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낙석 뚫고 1캠프 설치…눈사태로 긴장

다음날 베이스캠프에 들어온 지 처음으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한동호·이성기 대원은 오전 6시 1캠프를 건설하기 위해 떠났고 잠시 후 이남영 등반대장·김봉회·김유정·박명환 대원이 전진캠프로 향했다. 전진캠프~1캠프 구간은 약 60도의 설사면을 오르고 나면 다시 경사가 65~70도에 이르는 암벽과 설벽 구간을 통과해야 한다. 한동호·이성기 대원은 심한 낙석지대를 어렵게 통과하고 해발 4800m에 1캠프를 구축했다.

 
암벽 구간을 오르는 대원

한동호 대원은 회상했다. “1캠프로 가는 구간은 낙석이 매우 심했다. ‘휘잉’하며 쏟아지는 낙석이 나를 피해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큰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자연스럽게 위를 쳐다보고 공포감이 온몸으로 밀려왔을 정도였다.”

두 대원은 오후 6시 전진캠프로 하산했다. 이날 고소로 하산했던 허외탁·이주환 대원이 베이스로 올라와 원정대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8월 30일 화창한 날씨였다. 대원들은 베이스캠프에서 식량과 로프 등 장비를 정리하고 있던 대원들은 분주했다. 바로 그때 ‘쿵’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눈보라가 골짜기를 쓸고 내려왔다. 대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정상 바로 밑 중앙벽에서 대형 눈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눈사태가 일어난 곳은 다름 아닌 원정대가 3캠프가 들어서고 4캠프로 가는 중요한 구간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대원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8월의 마지막 날 이남영·이성기 대원이 2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1캠프를 나섰다.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높이 70m의 바위벽에 도착했다. 거의 직벽에 가까운 암벽은 눈이 녹아내리면서 등반 속도가 나지 않았고 체력 소모도 클 수밖에 없었다. 암벽에는 먼저 온 원정대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하켄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이성기 대원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거대한 바위에 눈과 얼음 대신 물이 흘러내려 등반하기가 쉽지 않았다. 벽을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갑과 신발, 속옷까지 젖었다. 완전히 지리산 계곡 등반을 하는 기분이었다.”

힘겹게 암벽을 넘어선 그들은 좁은 리지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2캠프에 식량과 장비를 안전하게 보관한 후 1캠프로 하산했다. 9월로 접어들면서 날씨는 좋았지만 기온은 크게 떨어졌다. 낮에는 영상 35도를 웃돌면서 눈은 그침 없이 녹아내렸지만 해가 지면 영하 20도로 기온이 떨어졌다.

 
2캠프로 가는 설사면을 통과하고 있는 대원들

3캠프 가로막은 300m 직벽

9월 2일 김유정·박명환 대원은 1캠프로 떠났다. 박명환 대원이 설사면에서 미끄러져 추락했다. 다행히 김유정 대원이 확보하고 있어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고 무사히 1캠프에 도착했다. 대원들이 따뜻한 꿀물을 건네주었다. 다음날 오전 6시 1캠프에 있던 전 대원들은 2캠프로 향했다. 오후 4시 40분 해발 5400m 지점에 2캠프를 설치했다. 2캠프는 케다르나스를 유일하게 등정한 이탈리아 원정대보다 3일이 빠른 것이어서 대원들은 1주일 이내에 정상에 설 것으로 기대했다. 9월 4일 한동호·이성기 대원이 3캠프(6100m)를 만들기 위해 등반에 나섰다. 3캠프는 케다르나스 원정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구간으로 약 300m에 달하고 직벽에 가까운 거대한 바위벽을 넘어야 한다. 직벽이 시작되는 구간에 도착한 대원들은 루트를 살펴보았다. 이탈리아·일본원정대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볼트와 하켄 등이 박혀 있었다. 워낙 직벽이고 상당한 난이도가 필요한 구간이라 대원들은 많은 하켄과 볼트를 사용하며 벽 등반을 시도했다. 하지만 준비한 확보물이 부족해 대원들은 2캠프로 내려왔다.

 
거대한 크레바스 구간
첫 번째 눈사태 300여m 쓸려가

9월 6일 3캠프로 물량을 공급하던 김유정 대원이 아이스바일(빙벽을 오를 때 사용하는 장비)을 빙벽에 찍었다. 순간 그의 몸이 ‘붕’ 뜨고 말았다. 그의 발과 손 사이에 있는 설벽에 금이 가면서 순식간에 추락했다. 그는 300여m를 눈에 휩쓸려갔다. 다행히 김봉회 대원이 확보하면서 더 이상의 추락을 막을 수 있었다. 김유정 대원은 크레바스 약 2m 앞에서 멈췄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김유정 대원은 얼굴과 허리 등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김유정 대원의 시계는 사고가 일어난 오후 1시 3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유정은 말했다. “많은 짐을 지고 3캠프로 가면서 빙벽이 시작되는 구간에 아이스바일을 찍었는데 갑자기 몸이 푹 내려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반드시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다행이 봉회 형이 확보하면서 멈췄다. 바로 앞에는 시커먼 크레바스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너무 놀랐다. 다쳤다는 아픔보다는 안도감이 앞섰던 것 같다.”

베이스캠프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렸다. 2캠프에는 폭설이 내려 대원들은 이틀간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눈사태가 발생해 텐트가 반쯤 묻혔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대원들은 초조하게 날씨가 호전되기를 기다렸지만 여의치 않았다.

9월 7일 2캠프에 있던 한동호·허외탁 대원이 3캠프로 향했지만 눈이 너무 많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두 대원은 3캠프로 향했고 오후 1시 40분쯤 삼각바위를 지나 중앙벽 바로 아래 3캠프를 설치했다. 처음 계획은 중앙벽 위에 3캠프를 설치할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날 오후 마을로 내려갔던 박명환 대원이 급하게 베이스캠프로 올라왔다. 전날 박희권 대원은 “아무래도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집에 전화해서 상황을 알아봐야겠다.”며 박명환 대원과 함께 하산했다. 박희권 부대장의 형님이 세상을 떠났고 어제 출상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두 번째 눈사태…2명 휩쓸려

이날 저녁 7시 눈사태로 부상을 당한 김유정 대원이 김봉회 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베이스캠프까지 하산했다. 숨 가쁜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갔다.

9월 9일 3캠프에 있던 한동호·이성기·허외탁 대원은 중앙벽을 올랐다. 잠시 후 무전기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기 대원의 목소리였다. “눈사태다! 빨리 피해.”

앞서가던 한동호·허외탁 대원이 눈사태에 휩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400m를 떠내려갔다. 다행히 두 대원은 수영하듯 눈 위로 빠져나왔다. 한동호 대원은 옷이 찢어지고 팔에 상처를 입었다.

한동호 대원은 말했다. “눈으로 눈사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빨라 도망갈 겨를이 없었다. 피켈을 눈 속에 박고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몸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눈에 떠밀려 가면서도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멈췄다. 정말 운이 좋았다.”

세 번째 눈사태…20살 막내 외침 “살려주세요!”

그러나 악몽은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7시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눈사태 등으로 늦게 저녁을 먹었다. 3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일찍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2캠프에 혼자 있던 이주환 대원이 소리쳤다. “눈사태입니다. 살려주세요!”

대원들은 텐트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다급하게 “주환아! 이주환! 대답해라.” 아무런 답이 없었다. 대원들은 어둠으로 가득찬 2캠프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주환 대원은 원정대에서 20살 막내로 참여해 대원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민병태 대장은 즉시 3캠프에 무전을 날렸다. “주환이가 눈사태에 당한 것 같다. 즉시 내려가서 구조해라.”

베이스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모두 기도했다. “오 신이시여. 주환이를 구해주소서.”

3캠프에 있던 이성기 대원은 가장 빠르게 2캠프로 내려왔다. 안타까운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1시간 30분이 지난 오후 8시 30분 이성기 대원이 보고했다. “2캠프 주변에 불빛이 보인다. 서로 불빛을 주고받았다. 주환이가 살아있다.”

순간 베이스캠프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대원들의 함성이 케다르나스를 들썩이게 했다. 이성기 대원은 급박한 상황을 말했다. “대장님의 무전을 받고 곧바로 내려왔다. 렌튼 불빛에 의존하며 거의 뛰다시피 내려왔다. 2캠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텐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주환이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뛰쳐나왔는지 신발도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주환 대원은 회상했다. “항상 칼을 목에 걸고 있었는데 저녁을 준비하면서 칼을 사용했다. 순간 눈사태가 텐트를 덮쳤다. 대장님에게 무전을 보내고 칼을 찾지 못했다. 눈 무게 때문으로 텐트가 온몸을 눌렀다. 아무리 찢으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텐트가 얼굴을 밀착했다. 순간 이로 텐트를 찢었다. 공간을 확보한 후 손으로 눈을 밀쳐내고 겨우 도망쳤다. 2차 눈사태가 있을 것으로 보여 무조건 바위 밑으로 뛰어갔다. 위에서 렌튼 불빛이 보여 신호를 보냈다. 성기 형이 왔는데 너무 고마웠다.” 이성기 대원과 이주환 대원은 9월 10일 새벽 1시 1캠프에 도착해 휴식을 취했다. 정말 드라마 같은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3캠프…아쉬운 하산

전 대원들이 베이스캠프에 모였다. 2캠프에 있던 텐트는 물론 식량과 장비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전 구간이 눈사태 위험이 있는 만큼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민병태 대장은 지시했다. “1캠프와 3캠프에 있는 장비를 최대한 활용해 속전속결로 등반해야 한다. 4캠프를 설치하지 않고 비박을 한 후 정상에 가야 성공 확률이 높다.”

9월 11일 베이스캠프를 떠난 한동호·허외탁 대원은 오후 6시 20분 2캠프에 도착했다. 4~5일 정도 날씨가 좋다면 3캠프에서 하룻밤을 잔 뒤 비박을 하며 정상을 갈 계획이다. 다음날 3캠프로 향하던 대원들은 눈사태로 고정로프가 끊어져 새로 설치하며 올라갔다. 3캠프에 도착한 한동호 대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중앙벽 아래 안전한 곳에 설치한 3캠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민병태 대장은 대원들을 2캠프로 하산하라고 지시했다. 대원들은 내려오면서 가스 몇 개와 장비들을 주웠다. 3캠프에 있던 장비들이었다.

9월 13일 전체회의가 열렸다. 어느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민병태 대장은 조용히 말했다. “베이스캠프에 들어온 후 날씨가 우리를 괴롭혔다. 네 번에 걸친 눈사태로 우리는 4명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함께 온 대원 모두 집으로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서운하겠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등반을 이쯤에서 끝내자.”

유동훈 대원은 회상했다. “우리는 웃으면서 돌아왔다. 비록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죽음의 지대를 몇 번이나 넘나들면서도 다들 무사히 돌아왔다.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 품으로 무사히 돌아온 동료를 껴안은 기쁨은 그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등반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9월 16일 추석 아침 원정대는 산을 떠났다. 케다르나스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취지문 1986년 1월 16일 네팔 가우리 상카르에 하늘 마루금을 완성한 날로부터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는 세월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목표가 있는 삶과 본질을 찾아 상사암에서 부터 우리의 젖줄인 지리, 설악으로 한라로 강산 곳곳을 삼백예순다섯 날 무던히도 헤집고 다녔습니다. 사계의 각기 다른 섬세함 속에서 삼라만상의 영광과 본질적 자연 리듬의 장엄함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계의 원동력은 시간과 인간의 오만함이 아니라 리듬이라고 봅니다. 자연은 모든 것으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초월성의 영원한 조화로 존재합니다. 만년설과 바위가 거대한 혼돈을 이루고 절대적 리듬의 조화가 살아 숨쉬고, 인도 가르왈히말라야 케다르나스로 순례를 떠나는 소박한 원주민처럼 미완의 수묵화에 하늘 마루금을 완성하러 갑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람들의 정복 개념에서 탈피하여 자연계의 일원으로써 우리 등반대는 재능, 정신력, 리듬 이 3박자를 갖춘 경험에 바탕을 둔 본능에 의한 멋들어진 등반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동안 도움주신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드리며 히말라야의 축복이 깃드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1997.7. ‘97한국케다르나스원정대 대장 민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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