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다시 큰 걸음(2)태동과 성장
개천예술제 다시 큰 걸음(2)태동과 성장
  • 김지원
  • 승인 2020.11.07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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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국민 누구나 한 줄은 외울 것 같은 이 시 ‘너에게 묻는다’를 쓴 안도현 시인은 1978년 제29회 개천예술제 문학부 경연에서 고등부 장원을 차지했다. 그는 개천예술제 60년사에 보낸 원고에서 백일장에 참석하던 그 시절을 회고했다.

“당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문학공부를 하던 나에게 개천예술제에 참가하는 일은 무척 흥미롭고 신나는 일이었어요. 대부분의 전국 규모 백일장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대구의 남쪽에 있는 진주로 친구들과 차를 타고 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설레는 일이었지요.”

‘11월’을 시제로 학생답지 않게 긴 시를 수려하게 써낸 안도현은 고등부 장원으로 문공부장관상을 받아갔다.

그의 말마따나 사람이나 돈이나 문화까지도 서울로 집중해가던 시절 진주의 개천예술제는 존재감이 남달랐다. 문학은 물론이요 미술, 음악, 무용, 연극까지 빠짐없이 전국의 재주꾼들을 불러 모아 실력을 겨루게 하고 으뜸과 버금을 가려 크게는 대통령상부터 장관상, 도지사상, 교육감상, 시장상, 대학 학장상, 언론사 사장상 등등 큼지막한 상장을 줄줄이 안겨주었다. 당시는 유치원, 국민학교의 어린 학생부터 중등 고등학생까지 예술제 상장 하나는 장차 예술가가 되지 않더라도 그 인생에 든든한 문화자산이 되었을 일이다.

개천예술제는 공모전과 백일장, 실기대회 같은 실전이 함께 펼쳐졌는데, 개천예술제 40년사의 부록으로 나온 수상자 명단을 살펴보면 진주지역의 학교는 물론이고 경남 일대와 안 시인의 경우처럼 전국의 학교에서 대회에 참석한 것을 알 수 있다. 개천예술제는 1949년 1회부터 2019년 69회까지 경연부문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크게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등의 주요 부문별로 신인, 경력의 예술인들을 발굴 해왔다. 70주년의 축제를 미리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난 개천예술제 문화예술 경연의 장을 들여다 본다. (10회까지는 영남예술제로 열었으나 이 글에서는 개천예술제로 통일해 쓴다.)

1949년~1960년

1949년 제1회 개천예술제에서 열린 한글시 백일장에는 본보에 연재 중인 ‘강희근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에서도 등장했듯이 이형기 시인이 장원을 차지했다. 웅변, 음악, 무용, 미술과 한글시 백일장이 열린 1회 대회 경연에는 부산·경남권에서 온 참가자들이 대다수였다. 개천예술제는 이듬해 한국전쟁 발발로 한 해를 건너뛰고 1951년에 2회 예술제를 개최했다. 2회에서도 음악, 무용, 연극경연과 한글시 백일장, 미술공모전, 웅변대회(변론)를 개최했다. 진주극장, 금성국민학교 강당, 촉석루 등에서 경연이 진행됐다. 1952년 3회 대회부터 문학부 동요공모와 사진부 사진공모가 추가됐다.

2회 대회에서는 국립국악원 일행의 아악연주가 돋보였다. 부산USIS 제공의 영화상영도 2회부터 시작됐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부산으로 후퇴한 수도를 따라 내려온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참석하면서 국내 유수한 시인들의 시낭독이 펼쳐지는 등 개천예술제의 문화 수준이 단기간에 성장한 시기였다. 경연장도 전시장도 부족하던 시기, 시내 곳곳의 다방들이 전시장이 되고 발표장이 됐다. 서제는 창렬사 마당에서 폐막 시상식은 진주극장에서 열리던 시절이다. 대회 취지문도 해마다 새로운 버전으로 등장했다.

지난해 64년만에 다시 개천예술제를 찾아 화제가 된 제주 오현고는 1953년 4회 대회부터 개천예술제 음악부 합주부문에 참가해 최고상인 ‘개천예술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진주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954년 5회 대회에서는 문화학술강연회가 연일 열려 시민들의 인문학적 갈증을 풀어주기도 했다. 예술제가 서서히 자리를 잡으며 공식 외곽행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5회 대회부터다. 교육연구회, 연합체육대회, 영남탁구대회, 특산품 전시, 궁도대회, 배구대회 등이 펼쳐졌다.

6회 대회엔 임방울, 박초월, 박귀희, 김향곡 등의 대한국악원 소속 국창급 국악인들이 참가해 전통예술의 품격을 더욱 높였다. 특히 6회 대회부터 오늘날까지 특별한 행사가 되고 있는 가장행렬과 유등대회가 시작됐다. 가장행렬은 진주토요회 주최로 11월 16일 첫 선을 보였고, 같은날 유등대회가 진주중등교육회 주최로 열렸다. ‘축하유등대회’라는 이름으로 진주시내 중고교생들이 학교별로 유등을 만들어 띄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직장별 골프대회, 제1훈련비행단 사진전, 공업전시회 등 외곽행사는 이후로도 계속 확대됐다.

7회 대회부터는 미술부에 실기대회가 추가됐다. 불꽃놀이가 행사에 처음 등장한 8회에는 시조경창대회가 생겨났고, 11회에는 미술부 서예실기대회가 포함됐다. 예체능 입시에서도 개천예술제 수상경력을 반영해주는 등 위상이 높아졌다. 1958년 9회 대회 때는 다음해 10회 대회에 제막할 계획으로 ‘개천예술탑’ 기공식을 열었으나 이 탑이 빛을 본 것은 한 참 후의 일이다.

개천예술제로 이름을 바꾼 1959년 10회 대회에선 취주악대 공연이 성황을 이뤄 진해 해병군악대, 해동고교 취주악대, 제주 오현고 취주악대가 공연과 시가지 행진을 벌이며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1961년~1969년

개천예술제 창시자인 설창수가 참의원으로 정계진출하면서 박세제와 함께 2인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개천예술제는 1961년 5.16 쿠데타와 함께 큰 변화의 시기를 겪게 된다. 참의원은 해산되고, 개천예술제도 기구가 대폭 개편되며 대회를 이끌어 오던 인사들이 대거 교체됐다. 12회 대회는 개천예술제 준비위원회와 함께 재건국민운동 진주시촉진회가 함께 맡았다. 이전까지 행사를 주최하던 문총이 해산되면서 새로 창립된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진주지부가 13회부터 30회까지 대회를 주최했다. 1962년 13회 대회위원장 최재호는 그 해 1월 경남일보 사장에서 물러난 설창수 뒤를 이어 경남일보 사장에 취임한 상황이었다. 이후 최재호·박세제 대회장과 위원장으로 개천예술제가 이어졌다. 박세제 역시 경남일보 임원이었다. 정치적 갈등으로 설창수가 빠져나갔으나 경남일보와 개천예술제의 인연은 여전했다. 이후 1969년 20회 대회부터 기획상임위원장으로 들어온 김윤양 역시 경남일보 사장에 취임한 해이니 개천예술제와 경남일보의 동행에 발을 맞춘 경우다.

예술은 정권을 가리지 않으련만 12회부터 20회까지는 단군 조상을 모시던 서제가 어지간한 상처를 얻었던 시기다. 개천의 제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토의 흙과 동해물을 헌정하던 순서가 삭제되고 13회부터는 분향과 제문봉독도 사라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개천예술제에 참가하고 15회에는 대통령이 임석해 연극부 경연 대상에 대통령기를 내리기도 했다. 이후 19회까지 개천예술제에는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참석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회가 되고보니 1등에게는 개천예술상을 주고 차하, 2등상을 부통령상으로 주던 것이 12회부터는 1등상으로 대통령상을 주는 부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문학부 한글시 백일장 고등부 장원을 한 경남고 서동훈과 연극부 단체 진주농과대, 무예부 궁도 단체 하동 하상정이 대통령상을 받았다. 13회 대회에서는 연극부 최우수와 가장행렬 1등이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 연극부 최고상에는 14회부터 대통령기가 이어져 내려오다 1983년 33회 대회부터는 무용 대상에 대통령상, 연극 최우수에는 문공부장관상으로 바뀌게 된다. 대통령상 이하로 문교부, 공보부장관, 경남도지사, 경북도지사, 경기도지사에 부산시, 마산시, 대구시 시장 명의 상들이 줄을 섰고 부산대, 숙명대, 동아대, 마산대 등 대학에서도 상장을 찍어냈다. 거기에 경남일보상은 물론, 국제신보 사장상, 부산일보 사장상, 마산일보 사장상 등 장려상장에도 이름을 찍어 넣었다. 예술경연 축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의 명성이 드러나던 시절이었다.

가장행렬이 자리를 잡아가던 13회에는 연극협회 진주지부가 주관해 논개 추모 특별행사를 가장행렬로 마련했다. 행렬에는 조랑말 4마리가 등장하고 오색 수송차에 논개를 모셨다. 경남도지사의 특별지원으로 전체 예산에 맞먹는 예산이 투입됐다는 후문이다. 14회부터는 가장행렬에 사전 주제를 제시하면서 내실을 기하기도 했다. 15회 가장행렬 구성팀을 보면 서산앙예술무용연구소, 금성국민학교, 진주소년단, 진주성남유치원, 진주시청, 진주남중, 진주농과대학, 진주투우협회, 대아중학교, 진주무용연구소, 진주성모유치원, 진주복음유치원,진주농고, 해인고교, 대동공업사 등이 경쟁을 펼쳤다. 이 중 진주남중과 진주농과대학은 ‘도청 환원’을 주제로 가장행렬을 꾸몄다.

제주와의 인연은 이어져서 1965년 16회 대회때 진·제 양주예연비(兩州藝緣碑)를 세우기도 했다. 제주 오현고는 꾸준히 진주를 찾아 개천예술제의 여러 행사에 취주악 공연을 선사하고 거리연주를 펼치고, 개제식에 축가를 연주하기도 했다. 17회 대회에는 영화인들의 무대인사가 마련돼 김진규, 최은희, 문희, 윤봉춘, 신상옥 등 은막의 스타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외곽행사도 부쩍 늘어났는데 부산 진선미 꽃꽂이 연구소의 꽃꽂이 경연, 경남공보관 사진전시, 기록사진전과 함께 배구, 축구, 탁구, 자전거경기대회까지 스포츠 행사도 늘었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늘어나면서 행사 기간 사람들의 물결 역시 끊이지 않았다. 15회 대회 때는 외곽행사로 조선일보가 창간 44주년을 기념하며 자동차도로경기를 진주총국 주최로 열었다. 전국지 몇곳은 축하비행전단 살포로 행사에 이름을 내기도 했다. 영화 상영도 늘어나 경남일보 지면광고에도 ‘개천예술제 특선푸로’라는 광고문구를 단 영화 광고들이 실렸다.

1970년~1983년

개천예술제가 20회를 넘긴 1970년대는 전국적으로 비슷한 행사들이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개천예술제에 대한 전국적 관심을 급격히 식어갔다. 예산도 넉넉치 않고, 중앙 예술인들의 얼굴을 보기도 어려워진 시기다. 1971년 21회 대회부터는 유등대회 참가범위가 늘어났다. 각급 학교 외에도 기관단체가 참여했다. 22회부터 유등대회가 ‘유등대회부’로 승격해 본 행사에 들어가게 된다.

23회부터는 개막서제 장소를 공설운동장으로 옮겼다. 이 즈음은 학생동원으로 일명 마스게임 같은 공연으로 운동장을 수놓은 것이 관례가 되었다. 천전국민학교, 선명여자고등학교, 진주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마스게임·카드섹션 공연으로 개제식을 장식했다. 1979년 10.26으로 개천예술제가 두번째 궐제를 맞을 때까지 개막식에서는 마스게임과 카드섹션, 고적대 공연 등 학생들이 동원된 대규모 공연이 축하행사로 열렸다. 공설운동장에서 개막식이 열리는 동안 제향의식은 생략됐다. 1978년 29회 대회때는 서제를 분리해 개제식 전날 개최했다. 창렬사에서 국토 흙과 동해물을 헌정하고 제문 낭독 등 제례의식이 부활했다.

1979년에는 30회 대회가 열리지 못했다. 10.26 사태로 행사가 취소되고 해를 넘겨 30회를 맞았다. 개막식 전날 서제와 전야제를 챙긴 대회였다. 31회와 32회는 서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32회 대회부터 미술부에서 개천미술대상전을 새롭게 정립해 출발했다. 종목은 한국화 서양화 서예 3개 분야 였다. 개천예술제 40년사에서는 33회 대회에서 미술부에서 제1회 개천미술대상전을 치른 것으로 나와있지만 다음 대회에서 3회 개천미술대상전을 열었다고 되어 있어 기록상의 혼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3회 개천예술제부터는 개천미술대상전은 한국화, 서양화, 서예, 조각 4개 분야로 늘었다. 이 때부터 문학부에서는 한글시 백일장 일반부를 독립시켜 개천문학신인상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음악부도 개천성악경연대회를 새로 시작했다. 연극부는 기존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개천연극제로 명칭을 변경했다. 무용부는 특장부문으로 대학·일반부 참가자들이 한국무용을 겨루는 개천무용제를 신설하고, 국악부는 개천국악경연대회를 시작했다. 사진부도 개천예술사진공모전으로 명칭을 바꿔 공모전을 개최했다. 연예부도 전국 대학생 보컬 경연대회를 신설했다. 특히 특장부문 개천무용제는 대상에 대통령상장과 해외연수 보조비가 부상으로 주어지고, 개천문학신인상 당선은 문공부 장관상, 개천미술대상전 대상에 국무총리상, 개천연극제는 대상에 대통령상 등 상장의 격도 크게 높아졌다.

종목별 예술경연이 이처럼 새롭게 보강되거나 신설된 것은 1983년부터 개천예술제가 경상남도 종합예술제로 지정되어 행사가 전반적으로 격상된 것이었다. 민속부에서도 교육감기 쟁탈 가장행렬 경연대회와 함께 경남도지사기 쟁탈 시군가장행렬대회가 열렸고, 유등대회도 교육감기 쟁탈로 각급학교 기관 단체, 사회단체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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