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란/수필가
수필은 인생을 담는 그릇이다. 수필 강의를 준비하며 ‘나의 삶, 나의 수필’의 여정을 다시금 차분히 들여다본다. 내가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 과제물로 일기 쓰기가 있었다. 공책 한 권을 다 채워서 숙제로 내었더니 담임 선생님께서 칭찬했다. 잘 쓴 사람은 그림 등, 다른 과제물과 함께 골마루에 일기장을 펼쳐서 전시회를 했다. 그때의 생기는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무렵, 문학소녀였던 작은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밭고랑에서 풀을 매며 세계 명작동화 이야기에 젖어 들었다. 입담이 좋은 언니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겹친 허리를 일으켜 세우노라면 사방에 어둠이 삽시간에 내려앉곤 했다. 처음으로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는 상상 속 친구로 다가왔다.
결혼과 퇴직을 동시에 하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지금은 제목도 스토리도 희미해진 문고판 소설을, 가계 일이 끝나면 밤을 새우며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세월이 지나니 대가족인 식구도 줄어들었다. 큰애가 대학에 들어가자 나도 대학 문을 두드렸다. 그동안 세월의 무게에 짓눌렸던 일상에서의 탈출은, 문학에 대한 강한 욕구로 만학도의 길을 걷게 했다. 문예창작과의 특성상 대부분이 만학도로 수업 시간은 진중하고 열의로 가득 찼다. 졸업이 아쉬울 만큼 배움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니. 짧은 대학 생활은 내 인생의 전성기로 기억된다.
수필은 삶으로 그린 자화상이다. 좋은 수필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독자들의 인생에 감동과 지혜와 깨달음을 주는 글이다. 나의 수필의 특성을 말한다면, 농경 정서의 풍경과 삶의 체험에 대한 음미(吟味)이다. 일생을 통해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내 삶의 자화상(自畵像)이다. 수필의 경지는 곧 인생의 경지이다. 나의 수필 쓰기가 독자들에게 작게나마 감동을 주는 글이 되었으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리라. 허정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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