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50]러시아 예르미타시 박물관(1)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50]러시아 예르미타시 박물관(1)
  • 경남일보
  • 승인 2020.12.1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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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암흑기를 이겨낸 문화쉼터
익숙한 알파벳이 아닌 키릴 문자 때문에 길거리의 표지판을 읽을 수가 없어서 박물관으로 가는 길을 한참이나 헤맸다.

암호 같은 생소한 표기 때문에 온전히 핸드폰 지도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집 건너 한집에서 판매되고 있던 기념품 마트료시카(Matryoshka doll)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인형 속에 또 다른 인형이 들어있어 열어보는 재미가 있는 이것은 1890년 수탉을 안고 있는 엄마와 7명의 아이들이 그려진 것을 시작으로 가족의 번영, 다산을 상징하며 현재는 더욱 다양한 디자인이 판매된다. 타국에 온 기분을 집에서도 느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골라보았지만, 수백 가지가 넘는 다양한 그림 속에서 마음에 드는 인형 하나를 선택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도시 곳곳에서 낯선 곳에 와있다는 설레임과 신기함이 느껴졌다.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 러시아는 유럽문화에 집중되어 있던 우리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닌 나라였다.

무려 11개의 시간대를 사용할 정도로 전 세계 국가 중 가장 큰 영토를 자랑하는 러시아는 14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많은 시련과 복잡한 역사를 거치다가 19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며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출범하게 되었다. 서양 문화예술에서 러시아를 빼놓고 생각하기 쉽지만 러시아는 음악, 미술 뿐 만 아니라 문학과 발레 등 수많은 분야에서 세계의 중심에 올라섰다. 이 중에는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와 소설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의 간판스타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예르미타시

표트르 대제가 1703년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옛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유럽과 가까이에 있는 위치적 특성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문화와 유럽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다채롭고 재미있는 도시다. 다양한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과 잘 정비된 운하위로 다니는 유람선은 마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나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떠올리게 한다. 표트르 대제는 앞서가던 서유럽의 문물을 러시아에 도입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방문했으며, 유럽의 건축가들을 러시아로 데려와 도시 건설에 도움을 받았다. 유럽의 정취를 느낄 때 즈음, 식탁위에서는 또 다른 이국적인 맛을 느낄 수 있다. 만두를 연상케 하는 러시아의 전통 음식 –y메니(Пельмени)와 김치찌개의 모습을 한 스프 보르쉬(borsch)는 외국 음식이 느끼하다는 편견을 깨트리기 좋은 음식이다.

눈과 입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매력 만점 도시지만, 이 곳 에서 박물관 앞을 그냥 지나친다면 반 쪽짜리 러시아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예르미타시 박물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핸드폰 지도에서 거의 눈을 떼지 못하다가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마주한 박물관의 외관은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궁전 같았다. 푸른 하늘에 맞서 에메랄드색의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는 예르미타시 박물관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이었고 나아가 러시아의 자존심이었다.

예르미타시는 세계적인 명성에 걸맞게 약 300만점의 소장품을 자랑하는데, 단 하루 만에 박물관 관람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이틀에 걸쳐 관람 할 수 있는 입장권을 판매하고 있다. 박물관의 개장시간에 맞춰 입장권을 구입하고 이틀 동안 박물관에 출석했지만, 이 시간동안에 작품을 모두 본 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겨우 몇몇 작품 앞에서만 조금 더 시간을 할애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인파와 단체 관람객들로 인해 박물관 내부에서 질서는 찾아 볼 수 없었지만, 러시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곳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예르미타시의 역사

예르미타시 박물관의 전신은 상트페트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의 개인 소장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제는 유럽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러시아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제국의 수장답게 수집하는 컬렉션도 남달랐다. 그의 소장품을 구경하려면 웬만한 이들은 감당하지도 못할 높은 도수의 보드카를 마셔야 했을 정도로 기이하고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르미타시는 고대 그리스어로 ‘은둔자(eremites)’에서 비롯된 것으로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없었던 초기에 불렸던 명칭이다. 예르미타시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프랑스, 영국 등의 유럽국가에서는 왕족과 귀족들이 예술 작품 수집에 열을 올렸지만 러시아는 작은 박물관도 하나 없는 문화적으로 뒤처진 나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여제(女帝)는 교육과 문화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여기에 많은 자본을 투입 시켰다. 여제는 재위기간동안 자신이 수집한 작품 2000여 점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감상할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 했고 이것은 새 궁전이 지어지며 실현 되었다. 그 결과 예르미타시 극장을 포함해 총 3개의 건물이 확장되며 오늘날 박물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여제의 컬렉션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수칙이 존재 했는데 방문객들은 모자와 칼을 두고 입장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예를 갖추어야 했고, 기지개를 켜는 것과 하품을 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 되었다.

여제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수집에 대한 열정은 러시아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문화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시발점이 되었다. 예르미타시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최초로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한 1764년을 박물관의 설립연도로 여기고 있다. 한편, 박물관이 순탄한 길만을 걸어 온 것은 아니다. 1837년 대 화재로 궁전의 내외부가 큰 피해를 입고 복구 되었고, 나치에 점령당했던 시기에는 박물관의 모든 소장품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텅 빈 벽을 배경삼아 작품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는 등 예르미타시는 러시아의 암흑기를 이겨낼 수 있는 커다란 쉼터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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