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소녀
잊을 수 없는 소녀
  • 경남일보
  • 승인 2021.01.2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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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영 (시조시인·청명법률사무소)
 

오래 전부터 남해의 절경에 반해 참 자주 다녔었다. 망운산부터 금산 보리암과 상사바위, 편백 휴양림, 가천 다랭이 마을, 설흘산과 응봉산 사이의 능선 오솔길, 호구산, 노도, 선소 바닷가…, 말 그대로 보물섬이었다. 간혹 후배들과 동행하기도 했는데, 현지 공무원이던 새까만 막내 후배가 길을 안내하며 남해 자랑에 열을 올렸었다. 언젠가 홍현 해라우지 마을을 지날 때였다. 바다 절경을 가리는 전봇대들이 나타나면 “전봇대도 귀엽죠?” 하며 너스레를 떨던 후배가 말했다. “선배, 시인잖아요. 해라우지로 사행시 지어 봐요.” 나는 즉답했다. “해는 넘어가는데, 라면을 끼리서, 우리끼리 묵은께, 지긴다.” 후배가 깔깔거리며 핀잔을 줬다. “선배, 시인 맞아요?”

그 섬에 가 본 지도 꽤 오래됐다. 2015년 여름 경남일보의 “남해군 ‘평화의 소녀상’ 내일 제막식”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못 갔다. 스크랩 해 두었던 신문기사와 사진, 그리고 당시의 소회를 적어둔 메모지를 펴놓고 시조로 쓴 것이 4년 전이다.

세상에서 가장 붉은 꽃을 보고 싶다면 / 남해 바다 남해 섬 숙이공원에 가보라 / 맨발에 단발머리로 한복 앳된 동백꽃 // 열여섯 살 바랫길에 산 채로 죽은 숙이는 / 영혼을 쥐어짜며 방울방울 맺히고 고인 / 피눈물 받아 마시며 하루하루 진홍물 들어 // 지옥으로 끌려갈 때 뜯겨 나간 머리카락 / 바랫길에 동댕이쳐진 소쿠리랑 호미랑 / 갯벌과 조개들까지 그때 그대로 모아서 // 영원히 시들지 않는 열여섯 살로 피어났다 / 우린 모두 동박새, 저 어깨를 떠나지 말자 / 울거나 노래하거나 붉은 빛으로 우거지며(‘동백소녀’ 전문)

숙이공원 ‘평화의 소녀상’의 주인공인 박숙이 할머니는 제막식 이듬해 12월 94세로 별세했다. 목에 칼을 들이댄 일본군에게 끌려가던 16살 소녀는 이제 영원히 지지 않는 동백꽃이 된 것이다.

최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소송 제기 12명 중 7명은 이미 별세) 일본 정부는 각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다. 1억 아니라 1조를 배상한들 빼앗긴 시절을 돌려받을 수 없는 할머니들에겐 진정한 사죄만이 그나마 위로와 배상일텐데 저들은 오히려 반발하고 있다. 양심이 없어 미안한 줄을 모르는 뻔뻔한 저들이 잊고 왜곡하더라도, 우리는 소녀들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우리 모두의 아픈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창 동백꽃의 계절이다. 전봇대도 귀여울 정도로 아름다운 남해의 풍광이 16살 소녀의 꿈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김성영 (시조시인·청명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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