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116]거제 둔덕기성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116]거제 둔덕기성
  • 경남일보
  • 승인 2021.03.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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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기성에 유배 온 의종

자고새는 다른 새의 알을 훔쳐다 품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이나 권세를 얻은 자를 자고새에 비유했다. 하지만 훔쳐 온 알을 부화시켜 키웠지만 새끼가 자란 뒤 키워준 자고새를 버리고 둥지를 떠나버림으로써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헛된 일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이나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권세는 끝내 허망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일깨워주는 존재가 자고새다. 조선말 무능한 고종을 등 뒤에 두고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다툼이 끝내 소중한 새끼를 잃는 자고새처럼 나라를 잃게 되었다. 고려때도 무능한 왕과 부패한 벼슬아치들의 권세와 재물을 향한 끝없는 욕망이 자고새처럼 때를 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던 시대가 있었다.

1170년 8월 고려 18대 의종이 보현원으로 가는 도중, 오문에서 술판을 벌였다. 의종이 술에 취하자 신하들에게 ‘여기는 군사기술을 연습하기 딱 좋은 곳이다.’라고 하면서 무신들에게 수박희를 하게 했다. 60세 넘은 대장군 이소응이 군졸에게 패하자, 6품 벼슬의 젊은 문관인 한뇌가 3품 벼슬인 무관 이소응의 뺨을 때리고 넘어뜨렸다. 왕과 문신들이 이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며 희롱했다. 이를 본 상장군 정중부가 몹시 분개했다. 얼마 전, 나이 어린 내시 김돈중에게 자신의 수염이 촛불에 태워졌던 굴욕적인 일을 당했을 때부터 복수를 벼르고 있었다. 보현원에 도착한 의종을 폐위시키고 수행해 온 문신들을 모조리 죽이는 사건인 무신정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900여 년 전, 무신들에게 쫓겨난 의종이 통구미배를 타고 거제도로 건너온 곳이 견내량이다. 견내량은 원래 임금이 건넜다는 뜻의 전하도(殿下渡)라고 부르다가 견하도-견내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거제도에 온 의종은 우봉산 자락에 위치한 둔덕기성에서 3년 동안 갇혀 살았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꾼 헛된 꿈

폐위된 결과를 보면 의종 입장에서는 몹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폐위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자겸 등 권신에 의해 왕권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고, 의종 자신이 호화로운 생활을 일삼았으며,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하다 끝내 폐위되어 거제도에 유배를 오게 되는 결과를 맞는다.

유배 온 의종은 둔덕기성을 재기의 터전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실정을 받아들여 참회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오히려 의종은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문신과 무신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왕노릇 한번 못하고 빌빌대는 것보다 자연을 벗 삼아 정과정곡을 지은 충신인 정서와 같은 문인들을 불러서 함께 학문과 시를 가까이하고 참선수행을 했다면 둔덕기성(폐왕성지)은 유배지가 아닌 지상낙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거제 섬주민들이 깍듯이 임금으로 섬기면서 군신의 예까지 갖추었다고 하지 않는가. 둔덕기성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스스로 백성이 되어 백성들과 함께 배고픔을 나누었더라면 비록 폐위 했지만 진정한 왕으로 거제도 주민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3년 뒤 김보당 등 의종 복위 세력과 함께 왕위 탈환을 꿈꾸다가 끝내 이의민에게 척추를 ㄱ자로 꺾여 죽임을 당하고 그 시신은 경주 곤원사 연못에 버려지는 곤욕을 겪게 된다.

의종의 한과 허황된 꿈이 서려있는 둔덕기성을 답사하기 위해 멀구슬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거제 둔덕면 우봉산 기슭으로 떠났다. 둔덕기성 옆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승용차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나니/접동새와 나의 처지가 비슷합니다/모든 것이 거짓인 줄을/지새는 새벽달과 새벽별만이 알 겁니다./죽은 혼이라도 임금과 한자리에 가고 싶습니다’ 둔덕기성 입구에 정서가 지은 ‘정과정곡’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동래로 유배온 정서가 의종을 그리워하면서 지었다는 정과정곡이 의종의 유배지에 새겨놓은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복원된 동쪽 성벽은 무척 웅장했다. 526m 둔덕기성 둘레길은 동쪽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허물어진 채 그대로다. 동, 남, 서쪽에 3개의 성문터가 남아 있고, 성을 따라 둘레길을 조성해 놓았다. 성 맨 꼭대기엔 식품류와 농사지을 씨앗 등을 저장했던 저장고가 있었고, 저장고 아래는 투석용 무기로 썼던 몽돌(석환)들을 모아놓은 무기고가 남아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견내량은 미세먼지에 가려 희미하게 윤곽만 보였다. 성 안의 비탈진 곳엔 아름드리 해송들이 주인이 되어 성을 지키고 있었다. 남쪽의 넓은 공간엔 건물터와 작은 농작지가 남아 있었다. 성의 남동쪽에는 새로 복원한 집수지(集水池)인 연지가 있었는데, 직경 16.2m, 깊이 3.7m나 되는 대규모 집수시설로써 물 16만6000ℓ를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산등성이에 저수장이 있었다니 정말 신기했다. 어쩌면 이곳은 가장 완벽한 요새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수처작주가 되어 지상낙원을 만들지 못한 아쉬움

이곳에서 의종은 왕으로서의 삶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뭇 백성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자 하는 소박한 꿈을 이루려 노력했더라면 이 요새는 유배지가 아닌 지상낙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의종은 어리석게도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가는 곳마다 삶의 주인이 아닌 자리의 주인이 되려고 하다 보니 스스로 파멸의 늪으로 뛰어들었다고 생각한다.

둔덕마을로 내려와 청마 선생의 생가와 묘소를 들렀다. 생가에서 묘소까지는 1.2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양지바른 명당자리에 위치한 묘소가 참 아늑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사는 자리를 지상낙원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삶의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차창 너머로 우봉산 기슭 둔덕기성이 말없이 배웅해 주었다.



/박종현 시인·멀구슬문학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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