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에는 먼저 소를 찾으러 떠나자
신축년에는 먼저 소를 찾으러 떠나자
  • 경남일보
  • 승인 2021.03.1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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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경남람사르환경재단대표)
흰 소의 해인 신축년(辛丑年)을 맞이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내가 있는 창녕 우포는 오랫동안 소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풀을 뜯어 먹는 소들의 천국이었다. 사지포제방에 서서 넓은 들판을 보며 만해 한용운의 흰 소를 생각한다. 서울 성북구 성북로에는 만해가 말년에 11년간 살았던 심우장(尋牛莊)이 있다. 총독부를 등지고 지은 아담한 집이다. 심우(尋牛)는 불교에서 견성에 이르는 수행 과정을 그린 10개의 그림인 십우도(十牛圖) 중에서 첫 번째 그림이다. 동자승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1단계이다. 두 번째부터 순서가 견적(見跡), 견우(見牛), 득우(得牛), 목우(牧友), 기우귀가(騎牛歸家), 망우재인(忘牛在人), 인우구망(人牛俱忘), 반본환원(返本還源)을 거쳐 열 번째 입전수수(入廛垂手)에 이르면 본성을 찾고 난 이후의 삶을 보여 준다. 흰 소와 하나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의 저잣거리로 들어가, 중생에게 손을 드리운다. 혼자 고고한 신선이 되는 게 아니다. 10장의 그림은 제멋대로 생긴 야성의 검은 소가 길들어지면서 점점 색깔이 변해 흰 소로 바뀌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삼독(三毒)에 중독된 검은 소가 점차 흰 소로 바뀌면서 이제 동자승은 소의 등에 앉아서 피리를 불며 집으로 온다. 마음의 주인과 소는 하나가 된 것이다. 십우도 중에서 여섯 번째 단계인 이 ‘기우귀가’ 그림이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한용운은 평생에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갖고, 집 이름을 지으면서 기우귀가가 아니라 첫 번째 단계인 심우를 선택했다.

요즘도 일상생활 속에 파묻힌 우리들은 하루하루 급한 일을 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일은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설사 중요한 일이라 하더라도 공연히 세상일에 신경 쓰다가 손해 보거나 다치는 게 무섭기도 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고분고분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했다.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고, 시키는 일만 하면 신변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는 눈 감고 살아야 했다. 이들 중에는 도대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등의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현재의 자기 모습이 노예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에 불교의 조사 스님들은 “그대가 일단 이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소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라 하였다. 바로 심우이다.

만해는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서 세상과 단절된 자아가 아니라 민족과 자신의 관계를 찾기 위한 수행을 하면서 조국과 민족독립을 생각했다. 만해는 오늘날 가족관계등록부에 해당하는 민적이 없었다. 일제가 관리하는 민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을 거부했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하지 않은 만해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민적이 없으니 그의 딸은 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아니 보내지를 않았다. 식량을 배급받지도 못했다. 그는 기미년 3·1운동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투옥되었을 때 쓴 ‘조선 독립의 서’를 찢어진 봉투에 넣어 죽을 때까지 20년이 넘도록 간직했다. 이런 자기 삶에 대한 철저한 행동은 절구공이가 닳아서 바늘이 되고, 책을 묶은 가죽끈이 닳아서 끊어질 정도로 심우(尋牛), 견우(見牛)의 힘든 수행을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심우장 온돌방 벽에는 그가 쓴 ‘마저절위(磨杵絶韋)’가 붙어져 있다. 신축년을 맞이해 흰 소의 등에서 피리를 불 생각보다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생각부터 해야겠다.

전점석 (경남람사르환경재단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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